석복(惜福) / 조이섭
손자 아이를 잃었다. 지난해 세모에 생후 8개월 난 손자를 멀리 보냈다. 여덟 달 동안 집과 병원을 오가다 급기야 중환자실에서 산소호흡기로 버티었으나 결국 일어나지 못했다. 생명 있는 것은 모름지기 한번은 아름답게 불타오른다던데, 여린 싹을 채 틔우기도 전에 떠났다. 손자도 손자거니와 금쪽같은 아이를 잃어버린 둘째 아들과 며느리의 탈기하는 모습은 차마 보기 어려웠다.
복을 아껴야 한다는 석복(惜福)이라는 말이 뇌리를 스친다. 마음이 얇은 데다 입마저 가벼워 할 말 안 할 말 가리지 못하고 다녔으니 무슨 복이 뭉근하게 고일까. 모든 것이 내 탓이다.
나는 피난민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웃에 온전한 가정이 없었다. 엄마 아니면 아버지가 없었고, 아버지가 있으면 술주정뱅이이거나 무능력자 또는 지독한 의처증에 걸린 남편뿐이었다. 여자 혼자 아이를 키우는 집에서는 악다구니 소리가 밤낮없이 골목으로 흘러들었다. 거리는 쓰레기가 넘쳤고 얼굴에 땟국이 흘러 얼룩덜룩한 아이들은 해진 옷을 상관 않고 몰려다녔다.
기어서 들고 나는 집들이 다닥다닥한 동네에서 가난이야 매한가지였지만, 부모님과 형제자매들이 사는 우리 집은 그중 나은 축이었다. 공업학교 3학년 여름방학에 공장으로 실습을 나가면서 다시는 이 동네에 발을 들이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부모님을 모시고 공장 옆으로 이사했다. 시멘트 블록에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단칸방에 부엌 하나가 전부였다. 그래도 마음이 부자이니 좁은 방 하나에 웅크리고 자고, 냄비 밥을 해 먹어도 웃음소리가 났다.
그때부터 시도 때도 없이 피난민촌 꿈을 꾸었다. 술주정뱅이 무능력자가 되어 연탄 가게, 쌀집에는 외상을 달아놓고 남의 집에 돈을 꾸러 가는 꿈이 단골 레퍼토리였다. 시간이 흐르니 꿈도 진화했다. 은행 빛 독촉을 당하거나 사채업자에게 쫓기다 가위에 눌리기도 했다.
우여곡절이 없지 않았으나, 엄벙덤벙하는 나와 달리 알뜰한 아내를 만난 덕분에 집을 장만했다. 아이들도 대학을 마치고 졸업 전에 취직했고 때를 넘기지 않고 참한 며느리 둘을 보았다. 나는 정년퇴직하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연금수혜자가 되었다. 하는 일 없어도 다달이 연금이 나왔다. 이즈음부터 피난민촌 골목길을 오가며 종이상자를 주우러 다니는 따위의 꿈은 꾸지 않게 되었다.
노년에는 건강이 행복의 조건이라고 한다. 나는 5년 전에 심근경색으로 응급실 신세를 진 적이 있지만, 평소에는 병원 출입과 거리가 멀다. 일 년에 두 번 당뇨와 고혈압 등을 뭉뚱그려 약을 타러 가는 정도이다. 아직 지팡이 짚지 않고 출입할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노후에 할 일이 없고 친구가 없는 것도 고역이라고 한다. 퇴직 전에 그림을 배우고 수필교실에 등록했다. 할 일이 있고, 화우(畵友)와 문우(文友)가 많고, 속 썩이는 자식이 없다. 밥 굶고 밤에 별을 쳐다보며 자지 않아도 된다. 더욱이 포항 며느리에게 외아들은 외롭다고 노래를 불렀더니 두꺼비 같은 손자를 내 품에 떡하니 안겨주었다. 이제는 정말 아무 걱정 없는 행복한 늙은이다 싶어 어깨가 절로 들썩거렸다.
그랬으면, 자족하고 경거망동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작은 행복을 감추지 못하고 자꾸만 주머니에 든 송곳을 꺼내 들었다. 친구들과 만나면 걱정이 없는 사람이라고 외고 다녔다. 아들자랑, 연금 자랑, 손자 자랑을 제 흥에 겨워 늘어놓았다. 듣는 사람이 싫어하는 줄도 모르고, 앞에서 고개를 끄덕여주는 맛에 했던 자랑을 하고 또 했다.
석복(惜福)은 현제 누리고 있는 복을 소중히 여겨, 더욱 낮추고 검소하게 생활하여 복을 오래 주리는 것을 말한다. 중국 송나라 어느 승상은 “말은 다 해서는 안 되고 복은 끝까지 누리면 못쓴다.(言不可道盡 福不可享盡〕”라고 했다. 작은 행복에 취해 자만했던 나에게 꼭 들어맞는 말이다. 쓸데없이 작은 복을 자랑하는 내 말을, 지나가던 삼신할머니가 듣고 시샘한 것이 틀림없다. 둘째 손자가 일찍 하늘로 올라간 것은 못난 할아버지 탓이다.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고 겸손 하라는 교훈을 얻는데 너무나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 수신(修身)이 제가(齊家)보다 어렵다고 하는 이유를 뼈저리게 느끼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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