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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토렴 / 양희용

토렴 / 양희용

 

 

 

국밥은 독특한 음식이다. 부엌에서 미리 국에 밥을 말아 손님상에 올린다. 한꺼번에 많은 사람을 대접하기에 편하고 날씨가 추울 때 먹으면 제격이다. 시골 장터에 장돌뱅이와 주모에 의해 국밥은 이미 외식문화로 발전해 왔다. 그 종류도 소머리국밥, 선지국밥, 돼지국밥, 콩나물국밥, 굴국밥 등으로 다양해졌다. 그중 돼지국밥은 부산과 경남 지역을 대표하는 향토 음식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돼지국밥이 언제, 어떻게 개발되었는지에 대한 확실한 근거는 없다. 다만 625전쟁 중에 피난길을 전전하던 사람들이 쉽게 구할 수 있는 돼지의 부속물을 끓여 먹은 데서 유래하였다는 이야기가 가장 설득력이 있는 듯하다. ‘허영만화백은 만화 식객에서 소 사골로 끓인 설렁탕이 잘 닦여진 길을 가는 모범생 같다면, 돼지국밥은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반항아 같은 맛이다.”고 했다. 부산 출신의 어떤 시인은 야성을 연마하기 위해 돼지국밥을 먹으러 간다.”는 시구를 적었다. 두 분의 표현에 의하면 시대에 저항하는 야성의 남자에게 잘 어울릴 것 같은 음식이다.

부산에는 유달리 국밥집이 많다. 나는 집 근처 돼지국밥집에 자주 간다. 국밥을 먹으면서 가끔 학창 시절을 생각한다. 장사하고 밤늦게 동네잔치에 다녀오신 어머니 손에는 이따금 따끈한 돼지국물이 담긴 주전자와 고기를 싼 신문지가 들려 있었다. 평소 먹기 힘든 고기 맛을 보여주기 위해 잠자고 있는 자식들을 깨웠다. 어머니는 국그릇에 식은 밥과 고기 대여섯 점을 얹어 몇 번 토렴한 후 국물을 부어 주셨다. 정구지와 양파, 새우젓과 양념은 없었지만, 김치 하나만 있으면 어떤 음식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맛을 내었다. 가난했던 시절의 고기 맛은 그게 전부였다.

토렴은 밥이나 국수에 뜨거운 국물을 부었다 따랐다 하여 건더기를 따뜻하게 데우는 과정을 말한다. 전기밥통이 없었던 시절, 밥과 고기가 늘 차가운 상태로 보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뜨거운 국밥을 후후 불어 식혀가며 먹는 즐거움이 없었다. 그렇다고 밥이나 고기를 미리 국에 넣어 놓고 끓이면 지나치게 불어터져서 식감이 떨어지고 형체도 바스러진다. 밥알과 고기에 국물이 잘 배어들게 만들어 따뜻하고 구수한 맛을 살려주기 위해 개발한 조상의 지혜가 토렴이다.

얼마 전, 부산진역 근처에 갔었다. 그곳에 설치된 무료급식소에는 춥고 배고픈 노숙자와 독거노인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자원봉사자들은 땀을 흘리며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밥과 국, 반찬을 배식해 주었다. 봉사자들은 힘든 내색 없이 밝은 표정으로 각자의 맡은 일에 열중했다. 나는 그 현장을 보면서 우리 주변에 힘든 사람도 많지만 고통을 함께 나누는 사람도 많다는 것을 느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공동체에도 토렴이 있어야 한다. 편안하게 사는 사람들이 힘들게 사는 사람들에게 온기를 조금이나마 전해주는 행동이 진정한 토렴의 의미라고 생각한다. 햇빛이 모든 곳을 공평하게 비출 수 없다. 양지도 음지에게 빛을 조금씩 내어 준다.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자가 그렇지 못한 이웃을 위해 온정의 손길을 내미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 가야 한다.

돼지국밥이 화면에 가장 많이 나오는 영화는 양우석 감독의 변호인이다. 1980년대 부림(부산의 학림)’ 사건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변호사 송우석(송강호 분)은 사법고시에 합격하기 전 밥값 신세를 지며 정을 쌓은 돼지국밥집 아주머니한테서, 그녀 아들 진우가 시국 사건에 휘말려 재판을 받는다는 소식을 듣는다. 당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된 대학생들을 변호한다는 것은 군사정권의 보복이나 방해공작을 받는 위험이 뒤따랐기 때문에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송 변호사는 같은 마음이었지만 고문을 받아 흉하게 된 진우의 상처를 보고 변호를 맡기로 마음을 정한다. 헌법에 명시된 국민의 기본권을 강조하면서 국가보안법에 맞서 싸우는 과정이 감동적으로 잘 그려진 영화다.

송 변호사는 진우의 상처를 보는 순간 대기업 스카우트 제의를 거절한다. 편안하고 행복한 삶이 눈앞에 보이는데 왜 그랬을까. 많은 시련이 예상되는데도 왜 변호를 맡았을까. 법을 전공한 지식인으로서 순수한 독서 활동을 하던 대학생들의 누명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안위보다는 어렵고 힘든 환경에 처해 있는 사람들을 위해 마음의 문을 열었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겼다. 많이 배운 사람이 무지한 서민들을 위해 베푸는 마음, 토렴하는 마음 때문이다.

영화에는 현실과 진실 속에서 갈등하는 또 한 명의 인물, ‘권성두라는 육군 군의관이 나온다. 그는 고문을 당해 의식을 잃은 학생들의 치료를 위해 대공수사 업무에 차출되었다. 학생들이 거짓 자백을 하는 모습을 본 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육군 장교로서의 심리적 압박과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로서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정의감에 얼마나 많은 고뇌를 했을까. 자신에게 닥쳐올 위험보다 약자를 먼저 생각하는 마음은 그가 법정에서 양심선언을 하도록 만들었다. 특별한 주인공이 아닌 평범하게 살아가는 우리도 누군가를 위해 토렴할 수 있다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우리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자유와 풍요는 누군가 간절하게 원하는 생명줄이고, 밥줄일 수 있다. 모두가 힘든 현실에서 따뜻함을 나누는 토렴이 없다면 사회는 점점 희망이 없는 어두운 세상으로 빠져들게 된다. 생각을 바꾸고 시야를 조금만 넓히면 우리의 관심을 기다리는 수많은 손길이 보인다.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으며 사회 전체가 따뜻해진다면 정말 아름다운 세상, 우리가 바라는 세상이 눈앞에 펼쳐질 수도 있다.

따뜻함을 나누는 토렴이 우리 모두의 가슴에서 모락모락 피어올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