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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포란(抱卵) / 김희자

포란(抱卵) / 김희자

 

 

 

다순 햇발이 대지에 내리쬔다. 사월 부지깽이는 땅에 꽂아도 순이 난다더니 꽃들에 눈길 주는 사이 연록이 무장무장 번진다. 새소리에 잠을 깨는 생명의 달 사월이다. 마른 땅에 단비가 연이틀 내리더니 그쳤다. 질척이던 땅이 꾸덕꾸덕해지자 닭장을 구경 오라며 기별이 왔다.

카메라를 챙겨 큰집으로 갔다. 닭장은 텃밭 옆 대숲에 있었다. 암탉 여섯 마리, 수탉 두 마리가 한집 식구다. 암탉이 애정행각을 하는지 서로 부리를 깃털에 비벼댄다. 그걸 보는 수탉의 표정이 요상하다. 나는 다문 입으로 미소를 짓는다. 닭장 안에는 항아리 두 개가 나란히 누워 있다. 하나는 알을 낳는 항아리이고 또 다른 것은 알을 까는 독이라 한다. 독 안에는 암탉 한 마리가 좌선 삼매에 든 스님처럼 앉아 있다.

보름 전, 올케언니는 작은 집에 쓰지 않는 장독 있나?”며 물어왔다. 동네에서 닭 몇 마리를 얻었다며 알통 항아리를 찾는 것 같았다. 뒤란에 엎어져 있던 독이 생각나 있다고 했다. 거동이 불편한 어머니께서 장 담드는 걸 손 놓은 지 오래라 사용하지 않는 독이었다.

한걸음에 달려온 올케언니는 달걀 낳는 것도 고맙지만 암탉이 알을 품으려 한다며 들떠 있었다. 독에 짚을 깔아 알을 품도록 하겠다며 항아리에 쌓인 먼지를 털어냈다. 알 까는 모습을 나중에 보러오라며 항아리를 이고 총총 사라졌다. 나는 닭이 알을 까는 모습을 볼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흥분되었다. 달콤한 흥분에 사로잡혀 며칠 동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생은 어디에나 있었다. 암탉이 알을 품고 있는 모습이 신기했다. 가만히 앉아 있는 것 같아도 병아리를 부화시키기 위해선 품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암탉는 삼칠일, 수무하루 동안 알을 품어 병아리를 깐다. 보통 열 개 정도의 알을 품는다. 알을 품는 동안에는 꼼짝 않고 잘 먹지도 않는다. 며칠에 한 번 알통에서 나와 물을 먹거나 모이를 먹고는 다시 들어간다. 그런 후 또 며칠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알을 품는다. 병아리를 키우는 중에도 알을 낳지 않는다.

알을 품어 생명을 잉태하는 일이 어디 쉽겠냐마는 나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다. 작품 한 편을 창작하기 위한 고통이야 따르지만, 며칠 굶어가면서까지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쓰기가 권태로워지면 글을 멀리한다. 작품이 제대로 그려지지 않을 때면 신경까지 예민해진다. 그러고 보니 알을 품는 닭보다 내가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묘하다.

암탉이 알을 품기 시작한 지 일주일, 이 주일이 지나고 세 주일째가 되면 몸에 축이 난다. 여름 한낮의 오랜 기다림처럼 고통을 겪고서야 알을 깨고 병아리가 나온다. 기이한 일은 암탉이 그러는 동안 알 위에 앉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알을 돌려가며 품는다는 것이다. 생각지도 못했던 특이한 행위이다.

알을 돌려 위치를 바꾸는 행위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알을 뒤집는 것이다. 알을 뒤집어 가며 품어 체온으로 알을 데운다. 알의 윗면은 품에 직접 닿기 때문에 데워지지만, 아래쪽은 땅에 닿아있어 잘 데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주둥이와 발로 한 번씩 뒤집어 주는 것이다. 데워진 알의 윗면을 아래로 가게하고, 아랫면을 위로 향하게 뒤집는 것이다. 사람들은 닭의 IQ가 낮다고 닭대가리라 놀리지만 기발한 지혜는 무시할 수 없다.

또 하나 놀라운 알은 알을 돌려 위치를 바꾸는 것이다. 배 밑에 있는 알 위치가 좋은 자리에 있기도 하고 나쁜 자리에 있기도 하다. 가운데 있는 알은 항상 어미의 가슴 털 아래에서 잘 데워지지만, 가장자리에 있는 알은 품과 멀어 제대로 데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알의 위치를 한 번씩 바꾼다는 것이다. 이 또한 주둥이와 발을 이용, 가장자리에 있는 알은 가운데로 모으고 가운데 있던 알은 가장자리로 내몬다. 암탉이 자리를 비운 사이 알통 속을 들여다보면 신기하게도 알의 위치가 바뀌어 있단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 데 말이다.

닭장 안을 유심히 들여다보던 나는 지절대는 새소리에 시선을 공중으로 돌린다. 대숲에는 오래된 나무들이 우뚝 서 있다. 큰 나뭇가지에 새집 두 채가 얹혀 있고 새들이 포르르 날며 지절댄다. 언제 지은 집일까? 포란(抱卵)의 계절이 되니 나무들의 몸 푸는 소리가 들린다. 앙상하던 나무에 연록이 돋아나고 봄기운이 우주 만물에 번진다. 겨우내 떠났던 새가 찾아와 공중의 집에 새를 들었다.

허공을 뒤덮은 햇살이 소소한 파문을 일으킨다. 새들도 짝짓기를 위해 저마다의 소리와 빛과 냄새로 짝을 부르고 있다. 세를 얻은 저 집에도 머지않아 새들이 알을 낳고 부화시킬 것이다. 알을 품고 있는 암탉처럼 아랫목 같은 둥지에서 새가 부화할 것이다. 새끼가 자라 날개를 펼치는 날까지 그곳은 새들의 소유지다.

어찌 조류만 알을 품을까. 장작하는 나도 작품을 품고 낳아 세상에 내보낸다. 한 편의 작품을 탄생시키기 위해 내공을 들인다. 내면의 혼불을 밝히지 못한다면 진정한 작가라 할 수 없다. 지절대는 새소리를 들으니 내 안에서도 글감을 키우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그러고 보니 포란이라는 낱말 하나에 우주가 들어있다.

지금은 생명의 신비, 그 울림으로 신성한 포란의 계절, , 새도 알을 부화시키기 위해 저렇게 공을 들이는데 작가인 나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제는 마음의 뒤란에 품고 있는 것들을 세상에 내어놓아야 할 때이다. 내 마지막 보루가 글을 쓸 수 있는 자유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