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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바다를 저장하다 / 이지원

바다를 저장하다 / 이지원

 

 

 

그녀를 만나러 간다고 생각하니 지난 세월이 떠올라 만감이 교차한다. 불쑥불쑥 끼어드는 상념을 물리칠 수가 없다. 흐릿해져 가는 세상 속에서 절망하던 날들이 스쳐간다. 그 벽과 마주서서 보낸 시간이 어느덧 십 년 가까이 흐른 듯하다. 이제는 담담하게 살아가고 있는 자신을 보니 칼끝 같던 마음도 세월 앞에 무디어 가는 모양이다. 오늘은 내가 그녀의 흰지팡이가 되어야 한다.

몸이 천 냥이면 눈은 구백 냥이라고 한다. 그런 눈이 점점 망가져 가고 있으니 갈피 잡지 못하는 제 마음을 단속하느라 그녀를 만나러 가던 나들이도 뜸해졌다. 서로 못 보고 지낸 지 서너 해가 되었다.

햇살, 나 보면 깜짝 놀랄 거야.”

며칠 전, 휴대전화기 너머로 들러오는 소리에 가슴 한자리가 서늘해졌다. 그사이 생긴 시간의 간극에 변화가 생겼음을 뜻했다. 어느 정도일까. 앞으로의 내 모습을 미리 보는 것 같아 잠시 갈등이 일었다. 이런 연유로 늘 마음이 바쁘다. 내가 매사에 열정을 가지는 것은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을 날에 대한 본능적 위기감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녀가 있는 해운대는 내가 사는 곳에서 넉넉잡아도 한 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버스에서 내린다. 그녀는 긴 우산 하나를 들고 서 있다. 날씨가 이렇게 화창한데 양산도 아닌 우산을 왜 가지고 나왔을까?

차마 케인은 아직 못 들겠더라.”

동백섬을 걸으며 그녀가 쓸쓸하게 웃는다. 헛기침을 하며 마음을 감추려 애를 써도 눈물이 앞을 가린다. 젖은 내 얼굴을 그녀가 제대로 불 수 없다는 게 고맙기까지 하다. 중도시각장애인은 흰지팡이를 드는 데도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보고 살았던 시간 속에 갇혀 눈앞에서 멀어져 가는 현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쪽빛 가을바다를 바다인 그녀가 보고 있다. 잔잔한 바다 한 귀퉁이, 반짝이며 흐르는 물비늘 몇 가닥, 자유롭게 떠다니는 뭉게구름 한 조각. 전부가 아닌 일부밖에 담지 못해도, 또렷하게 보이지 않아도 감사한 걸일까. 뭉근한 가을볕 속의 그녀를 보고 있자니 애잔하기만 한데 화장기 없는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다.

수년 전, 눈에 이상이 생겨 찾은 인과에서 시야가 좁아지면서 종내는 잃게 되는 병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이 나 모르게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실의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그녀가 내 손을 잡아 주었다. 그녀를 처음 만난 곳은 환우들이 모이는 온라인 사이트에서였다.

그녀의 닉네임은 바다였고 나는 햇살이었다. ‘바다는 서울깍쟁이답지 않게 속이 여린 사람이었다. 사람들의 닉네임을 보면 대체로 성품이 보인다. ‘햇살처럼 밝게 살고 싶은 나는 품이 넉넉한 바다와 도타운 정을 쌓아갔다. 무시로 드리우는 먹구름 앞에서 햇살이 비실대면 그녀는 노을빛 바다가 되어 너른 품을 내주며 나를 보듬어 주었다.

서울에 자주 가지 않게 된 것이 흐릿해진 눈 때문만은 아니었다. 마보다 진행이 많이 된 환우들을 보고 돌아오는 날이면 한동안 우울의 나락에서 헤어날 수가 없었다. 전등 불빛에도 눈이 부셔 모자를 쓴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식당에서 벗어 놓은 신발을 찾지 못해 쩔쩔매는 사람도 있었다. 누군가 챙겨주어야만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을 봤을 때는 억장이 무너졌다. 그 일들은 미구에 닥칠 내 일이기도 했다.

바다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걸어야 하니 좁다란 길에서는 뒷사람들을 먼저 보내주어야 한다. 오르내리는 계단과 울퉁불퉁한 길을 먼저 살피고 조심스레 걷는다. 생각만큼 힘들진 않다. 그런데 옆 사람을 의지해 다니던 내가 그녀의 지팡이 노릇을 하다니 처지를 잠시 잊었다. 계단 하나를 미처 보지 못해 함께 넘어질 뻔했다.

보통 사람들보다 시간이 두 배는 넘게 걸렸으나 무사히 바닷길 산책을 마쳤다. 그녀는 바다가 좋아서 남편을 따라 이곳으로 내려왔지만 거동이 자유롭지 못해 자주 나올 수가 없다. 그 암담함은 가족도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이해하기 힘들다. 세상 밖으로 점점 밀려나는 이 느낌을 알 리 없다. 시간이 갈수록 좁혀드는 시야처럼 자꾸 옹졸해지려는 마음을 경계하기 위해 바다와 마주서고 싶다는 것을 사람들은 눈치 채지 못한다.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달맞이길로 향한다. 자주 왔던 곳이라 잘 찾아갈 줄 알았는데 헷갈린다. 생각해 보니 나 혼자 찾아가 본 적이 없다. 약간의 곡절을 겪고 난 후 가려고 했던 레스토랑을 찾았다. 자리를 찾아 앉고 보니 둘 다 땀범벅이다. 땀을 식히는 동안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그녀는 차려진 음식에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 얼른 앞 접시에 종류대로 담아 오른쪽에는 샐러드, 왼쪽에는 스테이크라고 일러준다.

식사를 하면서도 화장실이 어디에 있는지 약한 시력의 촉수를 곤두세워 탐색한다. 직진하여 오른쪽으로 돌아가는 곳에 있는 것 같다. 언젠가 혼자 씩씩하게 가다 넘어진 기억이 떠올라 세심하게 동선을 살핀다. 맑은 미소를 지으며 마냥 행복해 하는 그녀를 보니 마음이 뿌듯했지만 이내 먹먹해진다. 이곳으로 오면서 솔숲에 핀 꽃무릇의 화려한 자태에 길을 잠시 멈추었다. 하지만 그녀는 제대로 보지 못했다. 스마트폰으로 찍은 사진을 확대해서 보여 주었다. ‘바다는 지금 우련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햇살도 마찬가지다.

오늘 본 바다는 우리가 앞으로 보게 될 바다 중에서 가장 넓은 그림으로 남게 될 것이다. 훗날, 눈물겹게 그리워하게 될 오늘을 영원히 기억하고 싶기에 이 가을바다을 바다햇살의 눈에 담아 저장키를 누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