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기장 / 안도현
눈을 뜨면 모기장 안쪽 구석에 몇 마리 모기가 봍어 있었다. 낡은 모기장 안으로 밤사이 침입한 괘씸한 놈들. 이들은 배가 터질 듯이 빵빵해서 잘 날아다니지도 못했다. 손바닥으로 이놈들을 잡으면 선홍색 피가 묻어났다. 외할머니가 말했다. 내 아까운 피를 요놈들이 다 빨아 먹었네. 그렇게 한바탕 소란을 피운 뒤에 모기장을 걷었고, 그리고 아침이 왔다.
방충망 대신에 모기장을 치고 모처럼 그 곳에 들어가 보는 건 아주 색다른 경험. 마치 모기장 왕국의 왕이 된 기분이 된다. 모기와 나방과 풍뎅이와 매미는 짐에게 감히 범접하지 못할 것이로다.
엎드려 책을 읽는 일도 왠지 위엄과 기품이 있어 보인다. 아,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황당한 착각이라는 것을 잠시 후에 깨닫게 된다. 모기장을 쳤으면 불을 꺼야 하는데 형광등을 켜놓았으니 온갖 날벌레들이 모기장 바깥에 붙어 있다. 나는 겨우 책 몇 줄을 읽고 있지만 그들은 아예 팬티차림의 나를 내려다보며 송두리째 읽고 있는 게 아닌가. 이 무슨 낭패란 말인가. 그렇다면 나는 영락없이 모기장 동물원에 갇힌 한 마리 서글픈 포유류가 아니던가. 모기와 나방과 풍뎅이와 매미에게 포위당해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인간.
책을 덮고 생각해본다. 저 곤충 손님들에게는 내가 모기장 안쪽에 있을까, 모기장 바깥쪽에 있을까? 나는 어떻게든 모기장 안이라고 우기고 싶지만 현명한 곤충 손님들은 이렇게 말할 것 같다. 너는 영원한 바깥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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