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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사랑은 본능을 누른다 / 정재순

사랑은 본능을 누른다 / 정재순

 

 

 

어여쁜 아가씨가 거리를 지나가면 백의 아흔아홉 남자들은 돌아다본다. 사랑하는 아내나 연인이 옆에 있어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본능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같은 여자 간에도 그러하다. 나는 패션 감각이 뛰어난 근사한 여자를 보면 기분이 좋아져 흘끔흘끔 쳐다본다. 하물며 남자가 끌리는 여자에게 눈길이 가는 것은 당연지사다. 무섭고 징그러운 것을 마주했을 때 여자들이 더 까무러치게 놀라는 것과 다름없다.

그는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 욕구가 강하다. 마음이 가는 여자에게 관심을 가지고 정성을 기울여 마음을 얻을 때까지 기다린다. 또한 그런 자신에게 지치지 않는다. 어쩌면 설렘에 길들여진 도파민 중독자일지도 모른다. 봄날의 나비처럼 꿀을 찾아 꽃 사이를 팔랑팔랑 날아다닌다. 성인남녀 간에 혼인빙자간음죄는 존재할 수 없고 간통이라는 언어 자체가 말도 한 되는 허구라고 주장한다.

아담한 키에 외모와 경제력이 지극히 평범하다. 그럼에도 주변에 여자들이 득실거린다. 일할 때는 최선을 다해 신나게 일하고 놀 때도 신나게 놀아야 된단다. 어떻게 하면 더 재미있을까 연구하느라 그의 머릿속은 하루 스물다섯시간이 모자라지 싶다. 여행을 좋아해 언제 어디서든 충동적으로 가볍게 떠나는 걸 보면 역마살이 다분히 있다.

예전에는 역마살이란 집안을 내팽개치고 무책임하게 돌아다닌다고 좋지 않은 삶이라 여겼다. 하지만 요즘은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면서 기발하고 다양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어 시대와 어울린다. 터득한 정보를 자기 업에 잘 활용하기 때문인지 작금의 불경기에도 거뜬히 버틴다. 긍정적이 그는 얼굴에 항상 환한 웃음을 달고 다닌다. 신경 쓰이고 골치 아픈 일은 하루빨리 잊어버리는 게 상책이라고 한다. 가끔은 그가 살아가는 방식이 이상적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문어발도 모자랄 그의 연애 방식은 호기심 유발에서 시작된다. 어느 순간에 호기심 충동을 일으키고 급기야 연인이 되는 순서를 밟아 간다. 여자들은 왜 그렇게 주위를 맴도는 걸까. 세심하게 헤아려주는 살뜰함 때문인가. 불나방마냥 감정에 솔직한 그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내게로 와 꽃이 되었다는 구절을 맹신하는 것 같다. 각고의 노력 끝에 기어이 포로로 결박한다. 그런 천성은 애쓴다고 익혀지는 게 아닌 탁월한 소질이리라.

숙련된 카사노바 일지라도 새로운 목표물이 생기면 당연히 기존의 연인들에게 무심해질 수밖에 없다. 치밀한 조절도 소용없다. 남자들이 아무리 잔머리를 굴린다고 해도 여자 손바닥 안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신은 공평하다고 했겠다. 남자들의 타고난 본능에 버금갈만한 여자들의 감또한 만만치 않다.

그는 좋으면 그만이다. 이것저것 따지지 않는 자유연애주의자다. 맨 처음 시큰둥하던 여자도 조금씩 파고드는 편안함에 서서히 길들여진다. 어쩐다, 사랑에도 유통기간이 있으니. 주렁주렁 매달린 여자들은 시간이 갈수록 도망치고 싶어진다.

여자들은 그의 마지막 여자가 되기를 꿈꾸고, 남자들은 그녀의 첫 남자이고 싶어 한다. 푸른 하늘처럼 맑디맑은 사람으로 알고 온갖 정성을 기울이던 여인이 그가 여성 편력자인 사실을 알았다. 서로에 대한 믿음이 사라졌다며 그녀는 이별을 고한다. 구속당하는 것을 싫어하는 그는 구차한 변명은 하고 싶지 않다.

하루 이틀, 몇 번의 달이 지나가고 선선한 가을이 찾아온다. 계절 탓인가, 그녀가 그리워진다. 함께 여행하고 같이 웃던 아름다운 시간들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세상에 혼자인 것처럼 외롭고 쓸쓸해지는 자신이 당황스럽다. 그만 비워내고자 밤낮 산을 오르며 자신을 담금질해 봤지만 그럴수록 기억은 선명해기만 한다.

남자는 그녀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는다. 세상의 시가 눈으로 들어오고 모든 노래가 자기 이야기처럼 들린다. 노랫말을 곱씹으며 그리움 속에 꽁꽁 갇혀버린 그는 꿈속조차 그녀로 가득 찬다. 자유로운 게 좋아 혼자가 편하던 남자는 이때껏 느껴보지 못한 낯선 아픔을 겪는다.

그제야 제 가슴속 깊은 자리를 들여다본다. 그녀만 곁에 있어 준다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다. 남자는 소식을 끊은 그녀에게 간절한 마음을 전하고 또 전한다. 사랑하는 사이에 이별이 찾아오는 것은 더 많이 사랑하지 않아서이다. 본능과 사랑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가 가슴이 알아보는 인연에 본능은 맥없이 무릎을 꿇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