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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들리는 것 들리지 않는 것 / 김국자

들리는 것 들리지 않는 것 / 김국자

 

 

 

소리는 공기의 떨림이다. 그런데 소리에 따라서는 자연적 현상을 넘어 어떤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오기도 한다. 보는 것보다 듣는 것이, 듣는 것보다는 만지는 것이 더 감각적이라고 하지만, 그리움은 아무래도 소리에서 더 느껴지는 것 같다. 눈은 새것을 찾지만 귀는 옛것을 찾는다는 말도 있듯이.

그리운 소리가 있다. 새벽을 가르는 두부 장수 소리, 어머니의 도마 소리, 굴뚝 소제하라는 징소리, 가을밤에 들리던 다듬이 소리.

듣기 좋은 소리도 있다. 산과山果 떨어지는 소리, 보길도 예송리 바닷가에서 듣던 몽돌 구르는 소리, 보리밭 종달새 소리, 외갓집 외양간에서 나던 소 울음소리 등. 하지만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듣기 좋은 소리는 음악 소리이다. 세상에 음악이 없다면 얼마나 삭막할까 생각해 본다.

우연히 월정사레 들른 적이 있었다. 저녁 여섯 시가 되니 젊은 스님들이 모여 번갈아 가며 북을 치기 시작했다. 한 스님이 북을 치고 물러서면 옆에 대기하고 있던 스님이 이어서 북을 쳤다. 그 모습이 조용하고 절도가 있었다. 북 치는 스님마다 그 모습이 사뭇 달랐다. 보슬비처럼 아주 조용한 몸짓으로 북을 어루만지듯 하는 스님, 소낙비 쏟아지듯 정렬적인 몸짓으로 두드리는 스님, 리드미컬하게 경쾌한 몸짓으로 치는 스님. 그 뒷모습들이 아름다웠다.

스님들이 북을 치는 것은 중생을 구제하는 데 있다고 한다. '법고'는 땅 위의 모든 중생들을 소리로 깨우쳐서 제도하기 위한 것이고, '운판'은 날짐승과 허공을 헤매며 떠도는 영혼을 제도하기 위함이며, '목어'는 물고기처럼 항상 눈을 뜨고 깨어 있으라는 뜻으로 물속에 사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 친다고 한다. 나무로 긴 물고기 모양을 만들고 배 부분의 안쪽을 파낸 다음 그 바깥 양 벽을 두 개의 나무 막대기로 두드려 소리를 냈다. 목어의 모양을 줄여 만든 것이 목탁이라고 한다. 범종을 치는 것은 지옥의 중생들이 고통에서 벗어나 불법의 진리를 깨우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그 깊은 뜻을 생각하며 북소리를 들으니 또 다른 감명이 왔다. 북소리를 듣고 발길을 돌려 나오는데 절을 수리하는 인부의 망치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마음 탓일까, 그 소리가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한 번의 망치 소리가 수백 년의 시간을 허공에 고정시키는 작업임을 목수는 알고 치는 것인지?"

세상에는 이렇게 들리는 소리가 있는가 하면 실제로는 들리지 않지만 우리에게 들리는 소리 이상으로 감명을 주는 소리가 있다. 바로 문장 속에서 들리는 소리이다.

是日也放聲大哭(시일야방성대곡), 이날에 목 놓아 통곡하노라.”

19051117일 을사조약이 체결됐을 때, <황성신문> 20일자에 장지연(張志淵)이 일제의 국권 침탈 음모에 분노하여 대성통곡한 논설 제목이다. 그 통곡의 소리가 오랜 시간이 흘렀는 데도 들리는 것 같고 가슴에 찡한 울림이 왔다.

階前梧葉已秋聲(계전오엽이추성). 계단 앞 오동나무 잎에서 이미 가을 소리를 들었다.’고 주자(朱子)<권학문>에서 말했다.

대문장가 한유(韓愈)는 그의 저서에서 大凡物不得基平鳴(대범물부득기평명), 무릇 사물은 평정을 얻지 못하면 소리를 낸다.’고 했다. 봄은 새로써, 여름은 우레로, 가을은 벌레로, 겨울은 바람을 빌려 운다. 그리고 사람은 문사(文辭)로써 울었다. ()나라가 망하니 공자(孔子)의 무리가 울었고, ()나라가 망하니 굴원(屈原)이 울었다. 맹자는 성선설(性善說)로 순자(荀子)는 성악설(性惡說), 한나라의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 당나라의 이백(李白)과 두보(杜甫)는 시()로 울었다고 했다.

세상을 살다 보면 듣기 좋은 소리만 듣고 살 수는 없다. 온갖 도시 생활의 소음들, 싸움 소리, 도를 넘는 충고나 잔소리도 듣고 산다. 같은 소리라도 듣느 순간의 심정에 따라서 다르게 들리기도 한다. 까치 소리도 어느 때는 반갑게 들리지만 시끄럽게 들릴 때도 있다. 하지만 싫든 좋든 세상의 소리를 들으며 살고 있다.

나는 가끔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본다. 옆집 감나무 위에 앉아 지저귀는 새의 소리를 듣고 나도 소리로 응답해 본다. 그러면 새도 조잘대며 응답하는 것 같다.

세상의 모든 생물들은 소리를 내며 살고 있다. 우리가 그 소리의 뜻을 알아듣지 못할 뿐이다. 반면에 문장가들의 소리는 실제로는 들리지 않지만 시간관 공간을 초얼하여 우리에게 감명을 주고 있기에 나는 책장을 들추며 그 문사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