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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수양매화 / 정목일

수양매화 / 정목일

 

 

 

사월 중순, 경기도 축령산 자락에 둘러싸인 아침고요수목원에서 한 여인을 만난다. 단번에 눈이 황홀해져 어쩔 줄 모르고 오랫동안 바라만 본다. 여인은 방문 밖으로 긴 주렴을 늘어뜨리고 그 안에서 홀로 가야금을 뜯고 있는가. 내 가슴에 덩기둥, 덩기둥 가야금 소리가 울리고 있다. 10만 평의 수목원을 가득 메운 꽃들 중에서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벚꽃, 매화, 목련 등 하얀 빛깔의 꽃이다. 나무 한 그루씩이 거대한 꽃 궁궐을 이루고 있다. 어떻게 한꺼번에 깨달음의 꽃을 활짝 피워낸 것일까. 꽃나무들은 순결과 아름다움의 화신이거나 성자인 듯하다.

눈부시게 하얀 꽃 궁궐을 이룬 벚꽃, 매화, 목련꽃을 바라보다가 키가 작고 꽃송이가 듬성듬성 맺힌 수양매화에 눈이 딱 머문다. 긴 머리카락이 땅에 닿을 듯하고 몸매가 늘씬한 미인이다. 처음 보는 고전적인 여인이다. 머리카락을 땅에 닿을 듯 풀어 내린 여인을 홀린 듯 바라본다. 하늘로 향해 머리를 곧추세우며 뻗어간 나무들과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영락없는 수양버들인데, 가지마다 듬성드성 매화 송이를 달고 있다.

매화는 사군자四君子 중의 하나로 지조와 결백의 상징으로 알아왔지만, 수양매화를 보긴 처음이다. 매화라면 지조 높은 군자의 꽃인 양 생각해 왔다. 그런 매화가 휘늘어진 수양버들 가지에 듬성듬성 맺혀 있는 것인가. 수양매화를 홀린 듯 바라보면서 우아하고 청순한 갓 서른 살쯤의 여인과 마주 보고 있는 느낌이다.

땅에 닿을 듯 축축 늘어진 실가지 위에 피운 수양매화는 맑고 고귀한 기품을 보여준다. 땅을 향해 피는 꽃으로 제 모습을 감추는 아름다움, 겸손이 묻어나는 꽃이다. 치렁치렁 늘어진 초록빛 반지르르 윤이 나는 실가지들에 띄엄띄엄 꽃송이를 달아놓았다. 한꺼번에 화들짝 피어나는 여느 꽃들과는 다르다. 단아하면서 여운을 지녔다. 땅으로 주렴을 드리운 채 방안에서 울리는 가야금 음절이 띄엄띄엄 꽃으로 피어난 것일까.

부드럽게 아래로 쭉쭉 드리운 가지의 알맞은 간격마다 꽃들이 자리 잡아 미소를 띠고 있다. 화창한 봄날에 꽃 드레스를 입고 나선 부끄러움 머금은 날씬한 봄 처녀의 모습이다. 부드럽게 휘어진 가지마다 영롱한 순백의 꽃, 수양매화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은은히 향기를 뿜어내고 있다.

수양매화는 네 가지 고귀함이 있다고 한다. 함부로 번성하지 않는 귀함, 어린 나무가 아니고 늙은 나무의 모습, 살찌지 않고 날씬한 모습, 활짝 핀 꽃이 아니고 오므린 꽃봉오리를 보이고 있다. 달밤이면 수양매화 가지 사이로 스며드는 향과 달빛은 보는 이들의 마음을 황홀하게 만들어 주리라.

수양매화는 달밤이면 주렴을 드리운 방에 앉아 임을 기다리며 섬섬옥수纖纖玉手로 뜯는 가야금의 음절이 방울방울 피운 꽃이 아닐까. 가장 여성적이면서도 우아하고 기품이 있는 동양의 멋과 운치로 피워놓은 꽃일 듯싶다.

매화를 보면서 지조 높은 선비를 떠올리곤 했지만, 수양매화를 보고는 고귀하고 향기로운 여인을 만난 듯하다.

수양매화는 겨울의 혹독한 추위와 눈보라를 견뎌내고 초록의 분수가 되어 뿜어 오른 모습이다. 섬세한 초록빛 머리카락에 듬성듬성 흰 매화를 피워놓은 모습은 고결하고 맑은 여운을 지니고 있다. 수양버들 가지에 어찌 매화가 피어 있는 것일까. 수양버들이 여성미를 드러낸다면, 눈 속에서도 피는 매화는 지조 있는 군자에 비교되곤 하지 않았던가.

수양버들과 매화가 만나서 한 몸이 된 나무를 눈부신 듯 바라본다. 이 땅에 존재하는 나무들 중에서 가장 섬세하고 은근한 여성미를 지닌 나무를 품어보는 순간이다. 수양매화가 피어서 봄날이 더 찬란하고 눈부시다. 한 번만이라도 만났으면 싶은 여인을 여기서 대면한다. 마음이 눈부시고 가슴이 두근거린다.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동양의 어여쁜 여인이 봄맞이 산책을 하고 있다.

아침고요수목원에 가서 봄철에 피는 수만 가지 꽃을 보았지만, 나무 중에서도 흰 꽃을 피우는 매화, 목련꽃이 시선과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보다도 청순하고 맑은 향기로 닿아오는 동양의 고유한 미소를 지닌 수양매화와 오랫동안 눈 맞춤했다. 고아하고 섬섬한 수양매화는내 마음속에 피어나 가야금을 울려주고 있다.

은은한 달빛 속에 한 번이라도 수양매화 같은 여인을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