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자의 자격 / 김정화
검은 연미복 차림으로 당당하게 입장한다. 리드미컬한 보폭에서 휘파람 소리가 새어 나올 듯하다. 머뭇거리거나 망설임 없는 확신에 찬 기세, 차가운 침묵과 엄격한 눈빛, 혼연일체 몰입시키는 단호한 몸짓. 단번에 분위기를 압도하는 저 힘은 어디에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말 없는 대화다. 허공에 그리는 그림이다. 손끝으로 추는 춤이라고나 할까. 물살을 헤집고 물길을 내듯 공중을 오르내리며 소릿길을 만든다. 어깨와 팔뚝과 손목이 요동치면서 날카로운 지휘봉 끝이 무대 구석을 향해 멈춘다. 짧은 큐 사인에 팀파니 주자의 손에 힘이 실리고 순서를 기다렸던 심벌즈의 강타가 클라이맥스를 장식한다. 일사불란하게 오케스트라를 통솔하는 결기 있고도 리듬감 넘치는 지휘자의 손짓, 과연 마에스트로라는 명예로운 호칭을 얻을 만하다.
얼마 전부터 클래식 동영상을 꾸준히 보내주는 이가 있다. 아마도 갑갑해진 일상을 음악으로 견뎌보라는 호의가 담겨있지 싶다. 넘치는 카톡 문장에 평소 같으면 클릭조차 않겠지만 이리저리 한가해진 근황이니 덤으로 온 해설까지 꼬박꼬박 읽는다. 여유를 가지니 재미있고 지루하던 고전음악이 답답한 마음을 슬그미 위로해주는 것이다.
연주곡을 영상으로 감상하는 것은 오디오로 듣는 것과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멜로디나 음향에 집중하기보다 악기나 사람에 먼저 시선이 가게 된다. 젊을 때는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피아노나 바이올린이 근사했는데 이제는 꿈결같이 등장하는 트라이앵글 소리와 묵직한 바순의 저음이 좋다.
최근에 함께 차를 마신 어느 바수니스트의 말을 곱씹어본다. 느리고 둔한 바순 음은 다른 악기의 음색을 돋워주고 스스로 묻힌다는데, 그래서 어떤 악기와도 궁합이 좋다고. 나는 그날 장작더미 같은 목관악기 앞에서도 인간이 하염없이 부끄러워질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몇 년 전 리허설 도중 세 동간 난 지휘봉 사건이 신문에 크게 실린 적이 있었다. 지휘자의 열한 번째 손가락이라 불리는 지휘봉이 부러지도록 연습한 집념과 열정에 감격했다. 비단 지휘봉뿐이겠는가. 소리북 치는 고수가 야문 탱자나무 북채를 일 년에 스무남은 개 부러뜨렸다는 글도 읽었고, 수필에 빠진 무명의 작가가 수일 동안 컴퓨터 전원을 켜놓은 채 퇴고하다가 모니터가 터져버린 사건도 있었다. 기껏해야 운전면허증 딸 때 용을 쓴 탓에 양말 두어 켤레 구멍 낸 적밖에 없는 나로서는 품격이 다른 예술 정신 앞에서 그저 머리를 조아린다.
누구에게나 생존이 걸린 물건이 있다. 지휘자에게 지휘봉은 자신의 존재나 다름없을 터. 우리는 이미 전설이 되어버린 카라얀을 기억한다. 고개를 떨구고 지그시 눈 감은 채 은빛 지휘봉을 잡고 있던 신전의 조각 같은 옆모습. 그가 지휘봉을 줍다가 지휘대에서 뇌졸중으로 넘어지던 그해에도, 내 또래의 소녀들은 당시 유행하던 지휘봉을 든 카라얀 스킬 자수를 놓느라 공을 들였다. 카라얀의 지휘봉이 위엄 있고 진지했다면, 라이벌이라 불리던 번스타인의 지휘봉은 온화하고 부드러웠다. 그는 때때로 지휘봉조차 내려놓고 어깨를 휘젓고 엉덩이를 들썩이거나, 눈 깜박임과 얼굴 주름과 입술의 씰룩임으로 지휘봉을 대신했다.
오늘날 게르기예프가 이쑤시게 지휘로 유명세를 타는 반면에, 무거운 지휘봉 때문에 목숨을 잃은 경우도 있었다. 루이14세의 궁정 음악가 륄리는 나무 봉을 들고 연주회장 바닥을 쿵쿵 찍으며 지휘하다가 자신의 발가락을 찧어 패혈증으로 생을 마쳤다.
몰론 지휘자는 지휘봉으로 승부하겠지만 어떤 지휘봉을 사용하는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두루마리 종이나 손수건을 흔들든, 바이올린 활이나 명아주 지팡이로 박자를 젓더라도 그들은 언제나 오케스트라 앞에 서 있는 가장 큰 나무이다. 지휘자라면 반드시 섬세한 감각으로 내공 있는 자신만의 음악적 해석력을 펼쳐낼 것이다. 그러나 권력을 탐하거나 이권을 거머쥔다면 그 단체는 중심을 잃게 된다.
명장 밑에 오합지졸 없다. 분명한 것은 단원을 섬기고 관객을 존중해야 한다. 그것이 지휘자의 사명이다. 무릇 지휘봉을 잡은 세상의 모든 수장들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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