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 / 박재완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각종 공사와 보수를 끝낸 빈집엔 치우고 닦아야 할 것들로 가득하다. 누구의 집인지도 모르는, 낯선 집. 걸레부터 빨아야 할까. 빗자루부터 들어야 할까. 무엇부터 해야 할지 막막하다. 청소는 누구나 하는 일이지만, 나 역시 늘 하는 일이지만 '청소'는 처음 하는 일이다.
오십을 넘긴 맨손의 남자가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아니, 일이야 있지만 결심과 실행이 쉽지 않다. 맨손의 남자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야말로 맨손으로 하는 일들뿐이다. 일에 귀천이 없지만 삶의 관성은 그 일들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대단히 고귀한 일을 하면서 살았던 것도 아닌데, 오십 년의 관성은 아직도 자신을 끔찍이 아끼고 있다. 매일 밤 책상에서 마음먹은 일들이 다음 날 아침이면 없던 일이 되곤 한다. 삶의 관성은 만만치 않다. 오십 년의 나를 멈추는 일이 만만치가 않다.
처음 보는 낯선 집은 수억 광년을 날아간 외계였다. 한동안 깊은 적막 속에 서 있어야 했다. 적막은 많은 감정과 느낌들이 뒤엉킨 것으로, 적막 속에는 아직도 몸속 깊숙이 꿈틀대는 체면과 그 체면이 웅변하는 아우성이 들끓고 있다. 그리고 적막의 가장 깊은 곳에 낯선 내가 서 있다. 적막을 걷어내자 그토록 낯설고 두려웠던 남의 집이 조금씩 읽어지기 시작한다. 건널 수 없던 낯선 외계의 입구를 건너 새로은 언어를 읽는다. 나이 오십을 넘긴 어느 날에 새로운 언어를 시작한다.
창틀에 쌓인 먼지를 걷어내고 집 안 구석구석에 붙어 있는 묵은 때를 지워낸다. 쉽지 않았다. 누군가 살아낸 흔적은 쉽게 걷어지고 지워지지 않았다. 그동안의 나의 몸이 지닌 기억으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고단한 근육과 힘겨운 호흡, 그리고 금쪽같은 시간이 겨우겨우 한 주먹의 먼지와 한 뼘의 묵은 때를 지워냈다. 그랬다. 산다는 것은 간단한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남긴 삶의 흔적이 그랬고, 그 흔적을 지워야 하는 나의 삶이 그랬다.
집이 점점 깨끗해지면서 마음도 조금은 가벼워졌다. 집 안엔 지워야 할 묵은 때가 있었고, 나에겐 지워야 할 오래된 '나'가 있었다. 집 안의 때가 지워지는 것만큼 나의 오래된 '나'도 조금은 지워졌던 모양이다. 처음 하는 일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받아들이기 힘든 자신의 낯선 모습 때문이었을까. 낯선 집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을 때, 오십 년의 관성엔 다시 한 번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그 멈추기 힘든 관성과 물러설 곳 없는 현실이 낯선 집에서 정면으로 만났다. 결국 낯선 집의 묵은 때를 걷어내는 일은 나의 '묵은 나'를 걷어내는 일이었으며, 멈추기 힘든 관성과 마주하는 일이었다.
수억 광년을 날아간 외계의 낯선 별에도 창밖엔 햇살이 쏟아지고 있다. 나뭇잎이 짙어가고 하늘엔 무게구름이 떠 있다. 곳곳에서 계절이 빛나고 있다. 창밖이 이토록 아름다운 적이 있었던가. 눈부신 햇살에 눈물이 몰려들고, 나부끼는 나뭇잎에 가슴이 오그라든다. 곁에 있는 것들이 이토록 소중했던 적이 있었던가. 구름 한 점, 보이고 스치는 것들이 모두 가슴을 지나간다. 모든 것들이 가슴을 지나가기에 삶은 아프다.
깨끗해진 집을 바라본다. 처음으로 닦아낸 남의 집. 처음 보는 낯선 나. 오십 년의 관성이 조금은 잦아들었을까. 언젠가 관성이 완전히 소멸하고, 새로운 관성을 부여받은 새로운 나를 시작할 수 있을까. 낯선 집과 처음 하는 일이 두려웠던 것은 낯선 집이 아니라 낯선 나를 만나야 하고, 집이 아닌 나를 청소해야 했기 때문이다.
여전히 창밖엔 계절이 빛나고, 모든 것들이 가슴을 지나간다. 다음에 만날 낯선 집은 어떤 모습일까. 무사히 다녀올 수 있을까. 나는 내일 다시 낯선 별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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