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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여름과 한국적 에로티시즘 / 박문하

여름과 한국적 에로티시즘 / 박문하

 

 

 

언젠가 시인 천상병의 수필 속에 여름철 송도 해수욕장에서 진로소주 한 병을 다 기울이고 나니 마치 진시황이 된 듯 비키니 스타일의 해수욕장 미녀들이 모두 삼천궁녀로 보이더라는 독백을 듣고 고소를 금하지 못한 일이 있었다. 도심에 위치한 2층 건물의 내 병원 진찰실에서 한여름의 무더위 때문에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거리를 내다보고 앉아 있으면 미니와 핫팬츠의 아름다운 밀림 속에 소요하는 듯 돈 안 들이고 즐거이 피서를 즐길 수가 있다.

이러한 아국적인 풍경 속에서 어쩌다가 잠자리 날개처럼 시원하고 격조 있는 모시 치마저고리를 입은 여인을 발견하게 되면 마치 옛날 연인을 만난 듯이 감흥이 새로워진다. 운치 있고 격조 높은 에로티즘은 노출을 서두르는 것이 아니고 모시 치마저고리처럼 어떻게 품위 있게 가리느냐에 있는 것 같다. ‘모시야 적삼 안섶 안에 연적硯滴 같은 저 젖 보소, 담배씨만큼만 보고 가소 많이 보면 병납니더경상도 지방에 전해 내려오는 민요의 한 토막이다. 여름철 모시 적삼 안섶 안에 아련히 비치는 이조백자의 연적 같은 오붓한 여인의 젖통, 좁쌀의 10분의 1도 못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담배씨만큼 쪼끔만 보고 가이소 그 이상 더 보면 상사병이 난다고 읊조린 우리네 조상들의 멋진 에로티즘을 오늘의 경박하고 값싼 에로티즘에 어찌 비교할 수가 있겠는가?

우리나라의 여름철 에로티즘을 말할 때 뺄 수가 없는 것 중 부채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부채라고 하면 여름철에 바람을 일게 하거나 서화書畵를 새겨서 풍류의 멋을 즐기는 것쯤으로만 알고 있지마는 여름철에 아낙네들이 샘가에서나 계곡에 젖통을 내놓고 등물을 치든가 멱을 감을 때 그 앞을 지나게 되는 한량들은 부채로써 슬쩍 눈앞을 가려줌으로 해서 아낙네들의 부끄러움을 덜어주고 부채 임자는 또 제대로 부채 그늘에 얼굴을 숨기고 아름다운 여체의 문요기를 만끽하게 되는 것이다.

조선 선조 때의 문장가며 평안도사平安都事를 지낸바 있는 백호 임제白湖 林悌는 사랑하는 나이 어린 기생에게 부채에다가 다음과 같은 연시戀詩를 써 보낸 일이 있었다. ‘내가 이 겨울날에 부채를 보내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지 말라. 너는 지금 나이 어려서 어찌 알 수 있겠는가마는 홀로 누어 임 그리워 잠 못 드는 밤중은 6월 염천보다도 더 가슴속이 타는 것이니 내가 이 부채를 보내는 뜻은 어린 너의 애타는 가슴속을 조금이라도 삭혀줄까 함이 크다.’

천한 외국의 흉내만 내지 말고 우리나라에도 옛날부터 이러한 격조 높은 멋진 에로티즘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두어야만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