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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두 바보 / 고윤자

두 바보 / 고윤자

 

 

 

귀이개를 찾으려고 서랍 속을 뒤진다. 노인이 사는 집은 여기저기서 낡은 냄새가 난다. 온갖 잡동사니들이 무질서하게 헝클어져 있다. 흩어져 있는 물건들조차 생활에 찌들어버려 오래된 냄새가 물씬 풍긴다. 구성원들조차 자신이 무엇에 쓰일지, 자기들 서로 간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도 모르면서 뒤섞여 지낸다. 나는 늙어버린 것들이 싫다. 자기만 옳다고 여기는 노인의 고집스러움이 싫고, 걸핏하면 자기 삶의 경험이라며 젊은이의 속도감을 경망함으로 몰아세우는 그 꽉 막힌 사고가 싫다. 오래 써서 뻣뻣해진 가죽처럼 두꺼워진 얼굴로, 젊은 사람들의 풋풋한 의견을 서투름으로 몰아세우는 고지식함을 개탄한다. ‘어르신이라는 나이에 걸맞은 행동이라며, 누르면 한참 만에야 반응하는 굼뜬 행동도 외면하고 싶다. 도대체 오래돼서 값진 것이 무엇이 있을까. , 친구, 장맛?

우리 집은 수명을 다해, 버려져야 할 물건들끼리 모여 산다. 그중에 버젓이 나도 이 낡은 살림의 구성원이라며 당당히 남아있는 것이 있다. 노인과 세월을 같이한, 몹시 늙어버린 TV.

현관문을 닫고 집 안으로 들어오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있다. TV를 켜는 일이다. 나는 적막함이 싫다. 그것이 두려워서라기보다는 정면으로 대하는 일을 되도록 피하고 싶어서이다. 이제 얼마 안 남은 인생을 이것저것 경험하는 일로 소비하기에는 나에게 남은 시간이 별로 여유롭지 못하다.

흔히 바보상자라 불리는 TV는 언제나 스위치를 누르기만 하면 나에게 일방적으로 말을 걸어온다. 무슨 이야기라도 좋다. 적막함을 깨는 일이라면 어떤 소재라도 괜찮다. 작은 소리로 얘기하라고 눈을 부라릴 필요가 없다. 그냥 다가가서 볼륨 스위치를 줄이면 된다. 얘기가 재미없고 지루하다고 핀잔을 줄 필요도 없다. 얼른 채널을 다른 곳으로 돌려버리면 그만이다. 몇 년을 나와 같이 동거하며 늙어가고 있지만, 나의 이런 처사에 불평 한마디 없다. 한참 이야기를 하는 중이라도, 내가 듣기 싫거나 바쁜 일이 있으면 그냥 그의 말을 끊어 버린다. 양해를 구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눈치를 살필 필요도 없다. 왜 나에게 그렇게 함부로 대하느냐, 자존심을 상하게 한다며 대들 만도 하지만, 용케 나는 아직 그런 일을 당하지 않고 잘 지내왔다.

눈이 뻑뻑해질 때까지 드라마에 몰입하다가도 잠이 오면 그냥 외면해 버린다. 내가 휴식에 빠져들어 가면 TV는 내 염려 속에서 사라져 버린다. 내가 잠이 들면 그도 쉬게끔 해주는 배려 따위는 없다. 아침이 허옇게 창 앞으로 다가올 때까지, TV는 저 혼자서 나를 위해 밤을 지새우며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가 얼마나 피로할까, 얼마나 심심했을까 따위의 염려는 아직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이렇게 무관심한 친구를 자신이 노쇠해질 때까지 그는 온 힘을 다해 몸을 바쳐 헌신해 왔다. 그렇다고 그의 건강을 염려해 준 적도 없다. 아프면 AS 기사가 오든가, 그도 안 되면 그는 마침내 폐기물이 되어 쓰레기통에 버려질 운명이란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의 헌신에 대한 고마운 마음도, 애처로운 감정도 없다. 이별에 대한 아픔은 더더욱 괄호 밖이다.

어느 친구가 나에게 이런 대우를 감내하면서 동무를 해 주겠는가. 필요할 때는 다가가 구애하고, 필요 없으면 사정없이 단절해 버리는 나의 이 셈 빠른 인격을 누가 달갑게 받아주겠는가. TV가 아니고 인간이었다면 사흘이 멀다 하고 나는 상대방으로부터 버림받는 신세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전에 내가 몸이 아팠을 때, 죽을 사 들고 방문해 준 친구가 있었다. 반갑기도 했지만, 나의 헝클어진 환경과 다듬지 못한 얼굴을 내보이기가 싫어서 몹시 불편했던 감정도 기억난다. 고맙기도 했지만 성가시기도 했다. 몸을 추슬러 다시 일어나게 되었을 때는 무엇으로 고마운 마음을 보답하느냐가 또 하나의 숙제가 되어 있었다. 고마움이 부담감으로 바뀌어 버리는 순간이었다.

TV가 낡아 있는 만큼 나도 같은 양으로 늙어 있다. 모든 행동이 민첩하지 못하다. 생각도 굼뜨고 감정도 몹시 둔하다. TV와 나는 사회에서도, 가족들에서도 필요한 존재에서 벗어난 지 오래다. 버려져야 할 낡은 TV는 오로지 나에게서 존재의 의미를 살리고 있고, 인간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나는 오로지 TV가 주는 즐거움으로 살고 있다. TV와 나는 서로 필요한 존재이지만, 내가 사라지면 같이 사라져야 할 공동운명체이기도 하다. 밥 한술 먹고 잠만 잘 자면 만족하고 사는 나의 삶과, 스위치만 켜면 바로 전원이 들어오는 TV의 삶은 단순하기가 너무 닮아있다. 거절할 줄도 모르고 반항할 줄도 모르는 밋밋한 삶이 친구 되기에 그저 그만이다. 건강하지 않은 몸을 애써 달래며 연명하는 것도, 길지 않은 남겨진 시간 속에서 누가 자신을 알아주기를 숨어서 바라고 있는 어리석음도 그렇다.

내가 수명이 다해 가는 TV를 내다버리지 않는 한 그와 나 두 바보는 둘도 없는 친구 사이이다. 나 자신이 나를 조용히 마주하면서 바보상자라고 불리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나는 이 친구의 바보스러울 만큼 계산할 줄 모르는 헌신을 닮아가고 싶다.

노인은 점점 바보상자와 하나가 되어간다. 두 바보는 오늘도 무의미한 일상 중에서 의미를 찾으며 앞으로의 여생을 향해 뜨겁게 어깨동무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