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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딸깍장(欌)을 보내며 / 김기섭

딸깍장()을 보내며 / 김기섭

 

 

 

나 홀로 덩그러니 남았다. 그 동안 아들과 함께 살아 왔으나 결혼을 하고 오늘 짐을 챙겨 가고 나니 허전함이 밀려온다. 이때 아내라도 있어 서로를 위로해 줄 수 있다면 좋으련만……. 텅 빈 방을 둘러본다. 나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딸깍장의 애처로운 모습에 아내의 얼굴이 겹쳐진다.

딸깍장은 판재 조각들을 문짝에 하나하나 끼워 맞춘 고급스런 장롱이다. 닦으면 조각들이 조금씩 움직이며 딸깍 딸깍 소리가 나기에 딸깍장이라 불렀다. 아내는 딸깍장을 시간이 날 때마다 정성스럽게 닦곤 했다.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다가 포항에 있는 다른 직장으로 이직한 후 새 아파트를 분양 받았다. 늘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기만 했던 꿈에 그리던 아파트였다. 입주를 하면서 헌 장롱을 버리고 대구까지 가서 새 장롱을 마련했다. 새 아파트에 어울리게 당시 이름 있던 Y씨 농방에서 가장 좋은 딸깍장을 봉급쟁이 처지로는 무리라고 할 만큼 거금을 주고 구입했다.

이쪽을 받치고 저쪽을 고이고 마침내 장롱이 반듯하게 자리 잡았다, 아내는 피곤함도 잊은 듯 장롱 속 먼지를 일일이 닦아내고 아이들 옷과 우리들 옷, 그리고 이불 등을 차곡차곡 정리해 넣었다. 그리곤 매일 왁스를 뿌리고 딸각딸각 소리를 내며 윤이 나게 닦았다.

부엌 하나 달린 조그만 셋방에서 장롱도 없이 옷들을 윗목에 차곡차곡 쌓아 놓았던 신혼 시절이 생각났던지 아내는 유달리 애착을 가지고 그야말로 애지중지하였다. 넓은 아파트와 번듯한 장롱, 승용차, 피아노 등 그토록 갖고 싶던 세간 들을 갖추어 가며 차곡차곡 꿈을 이루어 나갔다. 무엇보다도 건강하고 총명한 아들, 딸은 우리 가정의 커다란 보배요 믿음직한 자랑거리였다. 주말이면 아이들을 태우고 복숭아꽃이 만발한 들판을 찾아 가거나 경주의 고적지를 찾았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동해안 일대를 누비고 다녔다. 때로는 아이들을 처가에 맡겨두고 며칠씩 등산을 한다거나 장거리 여행을 다니는, 평범하지만 걱정거리 없는 행복한 시절이었다.

하늘이 시기라도 한 것일까. 뜻하지 않게 회사에서 먼 외진 곳으로 발령이 났다. 바다를 메우고 산을 깎아 새로 지은 공장이 가동되자, 많은 인원이 필요했다. 누군가는 그곳에 가야했다. 그러나 그 곳은 포항에서 거리가 너무 멀고 외진 곳이라 아이들 교육을 생각하니 도저히 응할 수가 없었다. 직장을 그만 두기로 했다. 아직 젊은 나인데 무슨 일이든 못할까라는 오기가 발동 되었는지도 모른다. 아내는 직장을 그만 두기로 했다는 말을 듣고 잠을 이루지 못했다. 불투명한 미래가 걱정되기도 했겠지만 안정된 생활이 깨어질까봐 불안감이 앞섰으리라.

대구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대구는 중.고등을 다녔고 친척들이 많이 살고 있어 고향과 같은 곳이다. 내 인생의 커다란 전환점이었다. 아무런 준비 과정도 없이 직장을 그만 둔 나는 가혹한 대가를 치러야했다. 마치 사람들에게 길들여진 동물이 적응 기간도 없이 야생에 던져진 꼴이었다.

엄청난 스트레스와 부담감은 정신뿐 아니라 육체마저 알게 모르게 조금씩 갉아 먹고 있었다. 마음은 조급해지고 소화 불량에 시달려야 했다. 아내도 겉으로는 태연한척 했지만 나보다 더 큰 고통을 속으로 감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내의 안색이 전 같지 않음을 느꼈다. 괜찮다며 고집부리는 아내를 우격다짐하여 병원을 찾았다.

진찰 결과 암이라는 판정이 나왔다. 속으로만 억눌려졌던 스트레스가 암으로 발전되었던 것이다. 뭐라고 위로를 해야 할지. 수술 날짜가 다가올수록 우리는 초조함에 입을 다물고 속으로 기도하며 서로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나를 안심시키기라도 하듯 미소 지으며 수술실로 들어가던 아내의 모습에 눈물이 왈칵 솟아졌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로지 죄인이 되어 그 초조하고 지루한 시간을 기다리며 좋은 결과 있기를 비는 것만이 전부였다.

수술실에서 보호자를 찾았다. 의사는 커다란 덩이를 보여주며 암세포라고 했다. 그물처럼 생긴 또 다른 암세포들이 전신에 퍼져 있었다. 의사의 표정에서 절망적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 동안 속 쓰림 같은 증상이 있었으나 약으로도 곧잘 치료가 되었기에 단순한 위염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차라리 가족은 포항에 두고 나 혼자 그 곳에 가서 근무할 걸 하는 죄책감에 몹시도 괴롭고 후회스러웠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병원 복도에서 부끄러움도 잊은 채 흐느껴 울었다. 이제 아이들 뒷바라지의 사슬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인생을 즐길 수 있는 나이 마흔 넷, 참으로 아까운 나이에 항암치료와 온갖 민간요법도 효과를 보지 못하고, 꿈과 소망을 뒤로 한 채 아내는 떠나갔다.

한 쪽 날개를 잃은 새 한 마리가 힘을 잃고 물위로 추락했다. 파닥거리며 물가로 나왔으나 더 이상 날 수가 없었다. 어디로 가야할지 방향도 잃어버린 채 절망의 나락으로 추락해가고 있었다.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밤이 좋아지고 혼자 있고 싶었다. 어떤 위로의 말도 상처를 아물게 하는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모든 것이 그대로 제자리에 있어주기를 바랬다. 누에처럼 나도 모르게 스스로를 가두어 가고 있었다.

이제 방안엔 딸깍장과 나만 남았다. 딸깍장은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어스름 새벽의 가로등처럼 빛을 잃어가고 있다. 딸각딸각 노래도 잊은 채 시든 꽃다발처럼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었다. 언젠가는 다시 돌아와 사랑해 줄 거라 기다리는 것일까. 그 동안 흔들리고 부대끼며 사느라 관심을 두지 않은 세월이 너무 길었다. 이제 너를 필요로 하고 사랑해 줄 수 있는 새 주인을 찾아 너를 보내 줄 때가 온 것 같다.

재활용품점에 연락을 하니 곧 가져가겠다고 한다. 막상 보낸다고 하니 애잔한 마음에 자꾸만 아내의 모습이 겹쳐진다. 처음 만나 가족이 되었을 때의 행복했던 순간, 무관심으로 버려두었던 지난 날 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벌떡 일어나 속죄하는 마음으로 쌓인 먼지를 털고 딸각딸각 소리를 들으며 정성 들여 닦는다. 그동안 주지 못한 사랑을 한꺼번에 주기라도 하려는 듯이.

장롱을 가지러 온 사람들은 깨끗하게 사용했다며 대금을 치르겠다고 한다. 오랫동안 가족처럼 함께해 온 물건이 아니던가. 더구나 아내의 고운 손때가 묻은 것을 돈으로 환산 하고 싶지는 않아 그냥 가져가라고 한다.

회자정리(會者定離)라 했던가. 만나면 반드시 헤어진다. 난처한 만남이 있고 속 시원한 헤어짐도 있기는 하지만 만남이 기쁨이요 행복이라면 헤어지는 것은 슬픔이요 아픔이다. 사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근근이 이어져 오던 딸깍장과의 인연도 그렇게 끊어졌다. 어쩌면 아내만큼 아껴주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부질없는 기대를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