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선, 긋다 / 문경희
산사의 일상은 속가에서 얽매이던 시계바늘의 행보와 다소는 무관하다. 모두가 잠든 시간, 한 발 앞서 새벽예불로 아침을 열었듯이 불야성의 예감으로 생의 기운이 더욱 펄펄해지는 저녁나절, 소찬소식의 겸손함으로 일찌감치 마지막 끼니를 해결한다.
산자락을 핥는 홍시빛 노을과 더불어 하루의 장막을 내려버린 절마당 평상에 네댓 명 식객들이 한갓지게 둘러앉는 것도 그즈음이다.. 으레 그러하듯, 소화도 시킬 겸 종일 외추처럼 묵직하게 걸쳤던 사찰의 사소 엄중한 분위기를 잠시 물리고 두런두런 한담이라도 주고받자는 것이다.
갑자기 한 처사님이 뒤란으로 돌아가더니 양손에 하얀 남자용 고무신 서너 켤레를 부채처럼 펼쳐 쥐고 나타나신다. 인심 좋게도 맘에 드는 걸로 골라 신으란다. 엊그제던가. 뒤꿈치를 꺾어 신은 운동화가 불편해 보였던지 편하게 고무신을 신으라길래 시부저기 웃고 말았는데 이참에 억지로라도 신기실려나 보다. 주변이 모두 흙 반 돌 반의 산길이다 보니 지압효과가 있어 소화가 잘되고 덤으로 오랜 시간을 거슬러 추억도 되새김질 되더라며 굳이 권하신다. 시쳇말로 성의가 괘씸하여, 앞서 머물렀던 누군가의 곤한 발이 드나들다 갔을 법 다소 꼬질꼬질해진 신발을 받아든다.
"고무신 세대 맞지요?"
"검정고무신, 그거 비 오거나 땀 차면 발에 시커먼 물이 배곤 했는데…."
"쭉쭉 밀리는 건 또 어쩌고요?"
살아온 공간은 달랐어도 거쳐 온 시절은 별반 다르지 않았던가 보다. 다들 그만그만한 연배라 낙엽에 불을 붙인 듯 추억의 한 소절 속으로 망연히 타오른다. 기껏해야 며칠간의 안면이 전부인 사람들이지만 인연을 중시하는 불가에서 함께 묵은 연緣도 가볍기만 한 것은 아닐 터. 그러저러하다 보니 통성명에 연식年式까지 자연스레 트게 된다. 그중 본의 아니게 연식이 제일 오래된 나는 잘날 것도 없는 나이 자랑만 한 셈이 되어 머쓱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이쯤 되면 죽어도 폼생폼사라는 소싯적의 풀기 빳빳한 치기는 내려놓는 것이 제격이리라. 넘어진 김에 쉬어 간다고, 건네받은 고무신을 뽀얗게 닦아 대충 물기를 가시고 신어 본다.
누군들 삶이 편하기만 하랴마는 불혹을 훌쩍 넘긴 세월에 대한 엄살이듯이, 위무이듯이 얼마간의 말미를 내어 낯선 산사에 들었다. 그간 나를 옭죄던 물리적인 시간도, 가식적인 형편도 우산처럼 접어두고 잠시나마 온전한 나 자신 속으로 공간이동을 하고 싶었다고나 할까. 더 늦어버리기 전에, 그간 무던히도 눈 흘렸던 스스로를 세상 가장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연습을 하고 있는 중이다.
지극히 불자였다거나 신심을 도탑게 하겠다는 작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낯가림이 심해 내심 걱정도 되었지만 이곳 또한 사람 사는 곳이라, 지내다 보니 금세 적응이 된다. 이따금 소름처럼 전신으로 번져오는 고적감에 무참해지기도 하지만 무거운 세상사를 벗는 대가이려니 여기면 순간순간 가슴 한 구석이 대책 없이 무너져 내리는 외로움쯤이야 못 견딜 바도 아니라 싶어 진다..
현실이라는 세찬 파고와 급물살 속에서 튕겨져 나온, 나는 잠시 세상의 사각지대에 홀로 가라앉은 작은 돌멩이다. 살아있다는 이유로 이고 져야 하는 짐도, 헤쳐 나가야 하는 굴레도 일주문밖에 걸망처럼 맡겨둔, 그저 바람이고, 구름이고, 타의 시선을 빗겨 꼬물대는 함한 마리 벌레다. 뒤란 언덕배기에 시린 네 발을 의연히 묻은 원두막의 울리지 않는 풍경이다.
오체투지로 막막한 대지를 꿈틀대던 파충류처럼 한 철 푸근한 동면을 꿈꾼다. 더 멀리 뛰기 위한 움츠림이라 굳이 변명을 하랴. 정신이 육신의 행보를 좇아 생에 다시없을지도 모르는 이 호사를 나누어 누릴지 알 수 없지만, 그저 단 한 번 도달해 본 적이 없는 진정한 무위의 지경에서 유유자적해보고 싶었을 따름이다. 무엇이든 앞장서서 해치워야 낙오되지 않는 세태 속에서 삼시 세끼를 거사처럼 치르며 나머지는 아둔한 백시가 되어도 좋을 여유를 가져보겠다는 것이 비겁하다거나 허송세월로 치부된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언젠가 마이산을 찾은 적이 있다. 말의 두 뒤의 형상을 한 거대한 바윗골에 앙금처럼 고즈넉하게 가라앉은 탑사의 경내에서는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수 만, 수십 만, 아니, 지상의 언어로서는 다다를 수 없을 만치의 절실한 염원이 이루어 놓은 비경이었다. 겹겹이 포개어 놓은 마음 하나하나를 어찌 다만 경치였노라 읽으랴만,
백여 년의 거친 풍파에도 흐트러짐이 없다는 탑들을 바라보며 위대한 틈을 읽었다. 탑신을 여태 지켜내는 힘은 단단한 돌에서 나와다기보다 돌과 돌 그 사이를 견고하게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무無의 공간, 바로 틈이 아닌가 싶었다. 대자연과 인간의 손이 이루어 놓은 절묘한 합작품을 앞두고 거한 틈의 함성을 들었다면 혼자만의 환청이었을까. 그 무형의 틈바구니 속에 계절을 흐르는 바람도, 말없이 무상한 세월도 시루처럼 차곡차곡 쟁여 넣고서야 다시 정수리로 모난 돌 하나 수더분하게 받아들일 너른 품을 키었을 법하다.
사노라면 외고집처럼 단단한 석편石片이 막아내야 하는 것도 있지만, 현실의 이름으로 달려드는 것들에게 다소곳이 길을 틔워 주는 일도 삶을 건너는 방편 중에 하나더라고 몸소 일러주는 탑의 체언體言이었다고나 할까. 분명 존재하지만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기에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치부되어도 할 말이 없을 듯한 무수한 틈의 봉분을 생각하면 지금 나에게도 다소간의 명분이 생길 법하다.
나도 나라는 탑을 지켜내기 위한 틈을 짓고 있다. 더러는 과한 욕심으로 삐걱거렸던 인생의 탑신으로 그 어떤 불순한 욕심도, 삿된 마음도 걸러낸 순도 백 퍼센트의 절대 공간 무無를 쌓기 위해 나 이외의 세상, 나아가서는 나에게 전부였던 나 자신마저도 조금씩 덜어내는 중이라 이 순간 발밑으로 아슬아슬 긋고 있는 정지선을 변명해 본다..
발바닥을 건드는 땅의 느낌이 좋다. 사위는 불씨를 되지피듯 흙도, 돌도, 풀도 늪처럼 깊은 잠에 빠져있는 원초적인 감각들을 겨냥해 저마다의 목소리로 말을 걸어온다. 뒤꿈치로 닿아지는 거대 자연의 언어, 그 자모음 낱자들이 경이롭기만 하다. 그들과의 새삼스런 소통으로, 수막 위를 질주하는 타이어처럼 내내 나를 겉돌며 달려온 시간들이 거스러미처럼 아리게 몸을 세운다. 지금에 와서야 처음처럼 순정한 오감으로 맞이하지만 실상 그들은 늘 그곳에, 그 몸짓으로 부단히 목청을 키우고 있었던 것을, 청맹과니처럼 세상에 눈멀고 귀먹어 정작 제자리를 지키지 못한 것은 내가 아니었던가.
굽 없는 신발 한 켤레가 묵언으로 인도하는 길 위에서 부재중인 나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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