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은 아니다 / 정원정
밤은 깊어만 갔다. 초가들만 옹기종기 모인 촌락에서 드물게 양철지붕인 그 집은 남의 집이었다. 흙 마당에는 가득히 낮에 깔아놓은 껍질을 벗겨낸 모시풀대가 짓널려 있었다. 옷을 벗어버린 듯 하얀 몸통만 남은 모시 풀 줄기는 다직해야 아궁이 땔감으로 쓰일 것이기에 마른 바람에 말리고 있었다.
그 무렵 인민 치하에서 동네 이웃 몇이 분주소로 잡혀갔고, 그 몇은 시신으로 돌아왔다. 한 치 앞도 가늠할 수 없는 전운이 저미한 시월 막사리였다. 나는 감시 대상인 반동분자 가족인지라 한시도 마음 놓지 못했다. 만약 밤으로 도피할 수도 있는 채비로 핫옷을 입은 채 그 집에서 하룻밤을 지새우게 되었다. 잠자리에 들었지만 잠은 좀체 오지 않았다. 삼사월 긴긴 해를 넘기듯 몸만 뒤척이고 있었다.
그때였다. 느닷없이 여럿이 누군가 마당에 짓널려 있는 모시 폴대를 겅중겅중 밟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마루 위로 절커덩절커덩 무거운 쇳덩이가 던져지는 구둣발 소리와 함께 벌써 천둥에 개 뛰어들 듯 삽시간에 장정 몇 사람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 순간 뒷방에서 잠자던 주인장은 속사포처럼 뒷문을 차고 어디론가 몸을 피해 버렸고, 그 댁의 부인과 막내아들, 그리고 나는 영혼이 빠져나간 오도깨비처럼 빳빳하게 기립 자세인 채 서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난전 몰리듯 일어난 일이었다.
이미 오밤중이었다. 총검을 든 그들 장정을 따라 그 댁 부인과 나는 중죄인이 되어 먹물 같은 어둠살을 헤치고 분주소로 끌려갔다. 그곳은 뭔가에 쫓기는 듯 부산스러웠고, 뒤숭숭한 분위기가 꼭 딴 세상 같았다. 그럴 것이 남쪽으로 물밀 듯이 밀려난 국군이 다시 십 리 밖까지 디밀고 와서 대치하고 있으니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긴장 상태였다. 그래선지 공포와 살기만 등등했다.
죽은 목숨이었던 나는 한마디로 마룻바닥에 앉혀졌다. 오빠의 행방을 대라며 두말없이 몽둥이로 후려쳤다. 몸집도 무시무시한 장정에게서 술내가 푹푹 풍겼다. 굵직한 긴 몽둥이 앞에 나는 거인 구둣발 밑에 밟힌 한 마리 지렁이처럼 뼛골까지 전율했다. 무위무능의 통절함이라니! 오빠는 진즉 대한민국을 따라 재빠르게 남쪽으로 도망쳤는데 어디라 행방을 댈 수 있겠는가. 속수무책이었다. 몇 대를 맞았는지 싸늘한 온돌방 맨바닥에 와 있었다.
그 방은 게저분한 불빛마저 근심스레 흐릿했다. 이미 사내 예닐곱 명이 겹겹이 갇혀 있었다. 물에 빠진 생쥐마냥 겁먹은 눈빛이 내게로 왔다. 생뚱맞은 앳된 스물두 살 여자애가 거기가 어디라고 밀어 넣어졌으니 생경스럽기도 했을 터이다. 그 중에 몇 사람은 동구 밖 냇가로 끌려가 차례로 총살당했다.
이튿날 고주박잠에서 날이 샜다. 저녁이 되니 다시 마룻바닥으로 불려갔다. 신앙관을 들이대며 "이래도 예수를 믿을래?" 기독교를 '이승만교'라고 트집 잡아 매질했다. 하지만 신앙은 금방 헤프게 헌신짝처럼 버릴 수 있던가. 죽으면 죽을지언정 홀라당 옷 벗듯 내팽개치는 것이던가. 긴 시간 닦달을 당했어도 버텼을지 그건 모르지만, 천행으로 분하소 소장의 만류로 매질은 딱 거기까지였다.
거기에 끌려온 사연은 이랬다. 인민위원들이 마지막 후퇴하면서 기독교인들을 그대로 두지 않을 거라는 입소문에 신속히 어디론가 숨어야 했다. 넓은 하늘 아래 몸 하나 감출 데라곤 없었다. 반동분자의 우리 집보다는 하다못해 교회 장로 댁에라도 은신해서 함께 행동하려 했다. 하필이면 그곳이 삼살방이 끼어있었을 줄이야. 결국은 그곳에서 붙들리고 말았다.
비인간적인 폭력이란 신체 피해뿐만 아니라 인간의 진정한 정체성을 근본에서부터 파괴시킨다. 폭력은 절망과 공포를 안겨준다는 의미에서 반사회적이다. 힘없이 당하는 잔인한 폭력은 평생을 따라다니며 심신을 괴롭힌다. 60여 년이 지난 일인데, 지금도 악몽 속에서 긴박하게 전쟁이 몰아치는 상황을 수도 없이 겪는다. 위기의 고비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다 잠에서 깬다. 불안했던 과거를 정신적으로 닫는 일은 쉽지 않다. 비인간적인 폭력으로 인한 고통과 상처는 아물지 않는다. 정신과 전문의에 의하면 고문의 기억은 치유되지 않는다고 한다.
폭력은 전시에만 행해진 게 아니다. 지금 이 땅에서 힘없는 사람들은 도마 위에 오른 고기 신세가 되어 폭력을 견디고 있는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국가의 권력을 업고 행해지는 폭력에는 힘없는 입장에서야 매번 지기 마련인지 모르겠다. <밀양>에 흉물스러운 어마어마한 (76만 5000 볼트) 전류가 흐르는 송전탑 건립을 반대하는 주민들은 몸이 다치고, 죽음으로 맞서고 있다. 그것도 할머니들이 대부분이다. 국가는 꼭 그렇게 성과 위주로 일을 추진해야 하는 건지, 국익도 경제 성장도 중요하지만, 사람의 생명보다 이윤을 먼저 챙겨야 하는지, 다른 방법은 없는 걸까.
욕심 없이 여생을 고향 땅을 일구고 살겠다는데 '개발이 국가 이익이 되고 경제성장률을 높인다 해서 마구잡이로 본거지를 떠나라니 이렇게 무례한 폭력을 가해도 되는 것일까. 온갖 고단한 농촌에서 치열하게 풀뿌리 삶을 사는 할머니들에게 그 노동에 희망을 거는 즐거움은 못 줄망정 이래도 되는 걸까. 어느 시인은 할머니들의 안타까운 심정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내가 나라한테 밥을 주라쿠나 돈을 주라쿠나
이래 농사짓고 살겠다는데
언제까지 넘들만 개잡드끼 잡들라카노'
일하는 사람의 노고와 땀이 제대로 대접받고, 정치의 주체가 평민의 편에 서는 날은 언제일까. 현 정치 현실에서 변혁을 꿈꾸어 볼 수는 없는 걸까. 좀 불편하고 조금은 모자라도 생명을 귀히 여기는 그런 세상 말이다. 비록 가난하다 할지라도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만으로도 행복할 수는 없는 걸까. 모든 상위개념을 경제 성장에 놓고 부도덕한 방식도 통과되는 이런 비정한 세상을 어찌 문명사회라 할 수 있을까. 폭력은 끔찍하고 야만적이다. 좋은 세상으로 바꿔지는 것은 선한 기운이지 폭력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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