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그리기 / 김상영
가뭄이 계속되자 풀잎조차 배배 꼬였다. 숲길이 차바퀴에 짓이겨져 먼지가 풀풀 날았다. 황소 같은 포클레인이 길을 넓혀 오솔길을 망쳐 놓은 거다. 그때 송전탑 공사 자재를 실은 트럭이 나뭇가지를 스쳐 부러뜨리며 묵직하게 다가왔다. 나는 길섶 싸리나무를 잡고 비탈진 기슭으로 발을 올려 디뎠다. 트럭 뒤를 따라 걸어 내려오던 젊은이가 눈살을 찌 뿌리며 말했다.
“이 길로 다니면 안 됩니다.”
안전모를 쓴 모습이 공사 감독인 듯싶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뺀다더니 나는 황당해서 되물었다.
“운람사 소풍 길을 이래놓고 뭐라 카요?”
당당했던 그가 한마디 내 말끝에 금세 수그러들었다. 따져봤자 승산이 없다는 걸 퍼뜩 알아챈 듯했다. 너무 쉬운 결말에 머쓱해진 내가 “욕보소.” 했더니 “조심하세요.”로 화답했다.
절을 오가던 호젓한 길이 변한 건 이뿐이 아니었다. 계사가 들어 선 거다. 병아리 수만 마리를 석 달 간씩 키워 육계로 출하한단다. 야적한 닭똥 무더기에서 고리타분한 냄새가 진동한다. 멱 감던 저수지가 녹조로 뒤덮였다. 산딸기 물에 흐르는 청정고향이야 옛말이 되었어도 양심이 보드라운 사장인지 성의를 표하긴 한다. 먹고 살고자 벌인 사업이니 좀 참아 달라는 의미겠다. 마을회관에 닭 몇 마리를 내려보낼 때가 있고, 집집이 계란 한판씩 돌릴 때도 있다. 닭똥 차에서 떨어져 아스팔트길에 콜타르처럼 눌어붙은 분비물을 긁어내는 모습도 보였다. 나는 마을회관 모임 때 금일봉을 내는 그에게 호감이 가서 통성명을 한 뒤로 가까이 지내고 있다.
산길을 오르려면 계사 입구에 세워진 방역 문을 통과해야 한다. 일주문을 닮은 시설 벽면에 ‘방역 상 출입금지’란 딱지가 노랗게 막아선다. 바닥에 시루떡처럼 깔린 석회 가루는 비에 질퍽거리고 바람엔 날리기 예사이지만 외길이니 피해갈 수 없다.
그럭저럭 지나다니던 어느 날이었다. 계사를 들락거리던 낯선 사람이 승용차 문을 내리며 작심한 듯 말했다. 우리 개가 차 앞을 얼찐댈 때마다 마뜩찮게 서행하던 사람이었다.
“이 길로 다니면 안 돼요.”
송전탑 공사 감독 말투와 닮았다. 동업자일까, 다소곳하던 사장과는 달랐다.
“소풍 길이었는데, 그럼 어느 길로 다니란 말인가요?”
으르렁대는 개 끈을 바투 잡은 채 내가 뜨악하게 대꾸했다. 오염된 환경을 감수하며 사는 속상한 속내가 나도 모르게 드러난 게다. 아내는 삐딱 다리를 짚고 무언의 응원을 보내고 섰다. 감염이 우려됨으로 외부인 출입을 금한다던 그도 쉽게 물러섰다. 길은 막을 수 없다는 걸 아는 거였다. 그도 ‘소풍 길’에 약했다. 나는 “좀 봐주소.” 하며 짐짓 읍소하는 자세로 그의 체면을 세워주었다. 명분이 약하나 결기를 돋워 뻗대는, 경우 없는 사람은 아닌 듯해서다.
우리 진돗개가 고라니를 잡은 적이 있다. 마을 토종닭을 물어 백배사죄한 일도 있다. 용맹한 우리 개도 때에 따라 꼬리를 내린다. 뜨내기 똥개의 여친 개를 집적거리다가 결사 항전한 수컷에게 물리고 나서다. 이건 아니다 싶으면 개도 수그린다. 비록 개일망정 경우를 앎으로 견공이라 존중했을 것 같다. 싸움을 구경하던 아내는 무슨 얄궂은 상상을 했는지 나를 보며 씩 웃었다. 잘 봐두란 의미인 것 같았다. 나는 짐짓 못 본 체하면서도 좀 억울했다. 연속극을 자주 보더라니, 막장 드라마가 아내를 이상하게 만들었다.
견공犬公보다 저돌적인 사람이 처처에 있다. 살다 보니 내가 냅네, 고개를 빳빳이 드는 이웃을 접한다. 농로 공사의 우선순위, 정부 보조금이 붙은 농사 장비나 자재의 분배가 불공평하다며 막무가내로 떼를 쓴다. 행태를 이해하기 어려우니 표현조차 쉽지 않다. 남의 땅을 야금야금 파고드는 사람도 있다. 평생 파고든들 땅 한 평에 못 미친다는 어원語源을 실감한다. 서 푼어치 욕심을 거두면 천 냥짜리 평안함이 드는 걸 정녕 모르는 것일까.
군함을 타던 때가 그립다. 계급이 정하는 대로 수그리면 그뿐이었다. 수전水戰에 이골나던 내가 육전陸戰엔 젬병인지 엉거주춤하게 산다. 세상은 해피엔딩의 드라마나 소설처럼 따사로운 유토피아만은 아니었다.
“나 다시 돌아갈래.”
잊을 수 없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 순수로의 시간여행을 꿈꾸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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