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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6

[좋은수필]바람초 / 이귀복

바람초 / 이귀복

 

 

나는 바람초를 좋아한다. 바람초를 입에 넣을 때마다 입술을 오므리고 휘파람을 불듯 ‘바 ‧ 람 ‧ 초’라고 가만히 뇌어본다. 그럴 때마다 가슴 저 편에서 솔내음 같기도 하고 눈물 냄새 같기도 한 싸아한 바람이 인다.

바람초. 그건 흰 박하사탕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 말은 어렸을 때부터 들어왔지만 사투리인지 표준어인지 알 수 없어 사전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바람초라는 단어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바람초’라는 말은 외할머니가 만든 조어造語쯤으로 생각하려 한다.

외할머니는 늘 바람초 향기를 날리며 고목처럼 야윈 몸으로 초가삼간을 지켰다. 그 곁엔 늘 어린 내가 앉아 있다. 외할머니가 즐기시던 바람초. 그 바람초는 요즈음 박하사탕과는 여러 가지로 의미가 다르다. 우선 바람초는 유명제과의 상표를 달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알사탕이 아니라 마름모꼴을 갖추어야 제격이다. 그뿐 아니라 손에 흰 설탕가루가 묻어나야 바람초로서 완벽한 조건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이쯤하면 나와 동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은 그 사탕을 떠올리고 공동의 추억에 잠길지도 모르겠다.

나는 요즘도 그 바람초를 찾아 헤맨다. 최상의 고급 과자만 고집하는 이 시대에 그 바람초를 구하기란 쉽지 않지만 어쩌다 눈에 띄는 날에는 여러 봉지를 사 온다. 그리고는 내게 공부하러 오는 아이들이 피곤한 기색을 보이면 눈을 감으라 하고 입에 살짝 물려준다. 그럴 때마다 아이들은 눈을 반짝이며 묻는다.

“이게 무슨 사탕이에요? 하나만 더 주세요.”

나는 아이의 귀에다 대고 사탕 이름을 말해준다. 가능하면 휘파람 소리가 나도록 ‘바 ‧ 람 ‧ 초’ 이렇게 속삭인다.

말년의 외할머니는 자리에 누운 채 세월을 보냈다. 자지러질 듯 기침을 할 때면 곧 숨이 넘어갈 것처럼 괴로워했다. 한바탕 기침을 한 할머니는 쓰러지듯 다시 자리에 누웠다. 그럴 때마다 나는 외할머니에게 바람초 물려드리는 일을 잊지 않았다. 그건 엄마가 나에게 길들인 일이기도 했다.

가까스로 호흡이 안정된 외할머니는 혼곤한 낮잠에 빠져들었다. 심심해진 나는 툇마루에 혼자 앉아 하릴없이 울타리를 감고 기어오르는 나팔꽃을 세었다. 그때 본 나팔꽃만큼 아름다운 꽃을 나는 아직 본 적이 없다. 적막한 여름낮이 무료해질 때면 나는 외할머니 머리맡에 놓인 바람초를 볼이 미어지게 털어 넣고는 우두둑 우두둑 소리 나게 씹었다.

장마가 지루하던 여름날이었다. 빗방울이 튀는 초가집 장독대 위를 손톱만 한 청개구리 한 마리가 폴짝폴짝 뛰어다니더니 비를 피해 외할머니가 잠든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할머니의 ‘뉴 파스짓’ 약통 위에 올라앉아 우두마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 청개구리가 괜히 미워져 애꿎은 바람초만 더 와작와작 씹었다. 그때 나는 세상이 무언지 몰랐지만 왠지 슬프다는 생각을 했었다.

외할머니는 오랜 세월 결핵으로 고생하시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이 되던 해 세상을 떠났다. 들추기에 가슴 아픈 가족사지만 그렇게 외할머니를 시작으로 나의 모계는 운명처럼 그 병을 끌어안고 살았다. 나의 어머니도 외삼촌도, 그리고 이종사촌들도 마지막으로 나에 이르기까지 그 병은 외가 가족들을 피해 가지 않았다.

사춘기 시절, 나는 브론테가家를 떠올렸고 나의 모계 역시 거부할 수 없는 ‘폭풍의 언덕’에 서 있음에 절망했다. 다행히 새로운 약제의 개발로 젊은 우리가 그 병에서 회복하는 사이, 어머니의 병은 더욱 깊어졌고 외할머니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외가 가족이 투병하는 사이 바람초는 청량제 역할을 하며 우리 곁을 지켰다. 그날의 바람초는 내 기억의 원형질이 되어 이제 휘파람 향기로 남았다. 내 문학의 모태가 된 외가, 그리고 다시 느낄 수 없을 만큼 극진했던 외가 식구들의 사랑, 그 아픔과 그리움이 없었던들 오늘의 나는 어디에서 이 지순한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인가.

바람초 한 개를 깨물 때마다 나팔꽃이 한 송이씩 피어난다. 또 한 개를 깨물면 작은 청개구리가 온 방을 뛰어다닌다. 그날의 시간이 내 가슴에서 막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일전에 TV 뉴스에서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박하사탕에 표백제가 대량 함유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쓸쓸하게 웃었다. 바람초가 아니라 박하사탕인데 뭘 하고…. 누가 내 기억에 표백제를 칠 수 있을까. 그리운 그 시간만으로도 이미 희디흰 휘파람인 것을!

한 가지 애석한 일은 공부에 지쳐 하품하거나 졸린 아이들 입에 더 이상 안심하고 바람초를 넣어줄 수 없다는 사실이다. 내겐 바람초지만 아이들에겐 그것이 박하사탕이라는 걸 어찌 내가 모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