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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6

[좋은수필]등명여모燈明如母 / 이정화

등명여모燈明如母 / 이정화

 

 

등대는 구도자를 닮았다. 백 년을 하루같이 오롯이 지켜 서서 보시의 불을 밝힌다. 희뿌연 해무 속에서 어른거리는 불빛만이 들고나는 배들에게 생명의 길을 인도한다. 등대에게는 구도의 길이 숙명과도 같았다. 바다는 팽팽한 부력으로 배를 밀어 올린다. 바람이 일으킨 파도는 이리저리 휩쓸리다가 길고 짧은 용틀임을 한다. 얼마나 많은 배들이 세상의 모든 소리를 잠재우는 그 바다 아래로 침잠해 들었을까. 한없이 가볍고 부드러운 물이라지만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을수록 무거운 벽이 되어 버린다. 거친 세상처럼 짓눌려 온다. 모든 것을 삼킨다 해도 티 하나 나지 않을 바다이다. 그 거친 바다를 내다보며 가랑잎 같은 배들을 불러 모아 품어 주는 등대는 바다와 맞서지 않았다. 희미해져 가는 미래를 등불처럼 간절히 밝히고 싶었다. 백여 년 전, 고요한 동쪽의 나라 조선에 등대는 없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대륙으로 뻗어 가기 위해 군산 앞바다에다 어청도 등대를 세웠다. 애당초 동기야 순수하지 못했을지언정, 그러나 등대는 정작 누구의 편에도 기울지 않았다. 그저 칠흑 같은 바다 위에서 쏟아지는 별에 의지하며 허둥대던 누군가의 강력한 생명의 빛줄기였으리라. 침략과 전쟁을 일삼는 인간보다 사람이 만든 등대가 내 편과 네 편을 차별하지 않았다. 등대는 지나가는 배를 인도하고, 바다는 배가 지나간 하얀 경계선마저도 지워 버린다. 등대는 갈등이 잠잠해지기를 기도하는 심정으로 지금껏 불룩하게 튀어나온 바위와 암초를 알리며 바람 앞에 서 있다. 어청도 등대는 백 년을 그 자리에 서서 묵언하며 명상하는 구도자처럼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질곡의 역사를 바라보았으리라. 침략의 통로가 되었던 등대, 그는 나라 잃은 충격과 상실의 아픔을 인내해야만 했다. 그러고 보면 등대는 정신의 헌신과 육신의 희생을 보람으로 여겼던 세상의 엄마들을 닮았다. 엄마는 등대였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바다를 향해 고독한 눈길 거두지 않은 의연한 등대의 심정이었다. 그렇게 한량없이 보듬어 안아 주던 엄마가 이승을 떠났다. 늙어가는 자식들이 엄마 잃은 아이처럼 목 놓아 울었다. 구슬픈 갈매기 소리 같은, 빈 뱃고동을 울리며 떠나는 눈물 소리에는 한이 서려 있었다. 허망하여라. 울음의 밑바닥은 허공을 정처 없이 흘러 다녔다. 시인 카몽이스는 등대가 선 자리를 일컬어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곳이라고 했다. 삶의 마지막에 다른 생을 기약했을까. 이승과 저승으로 나뉜 단절 앞에서 등대의 훤한 불빛마저 깜박거리다 스러져 가는 듯 위태로웠다. 지난 추석, 엄마 없는 첫 명절을 맞았다. 보름달은 외로운 이들을 골고루 비춰주고 있었다. 소생의 근원은 생명 없는 무덤으로 남았다. 흩어져 사는 피붙이들에게 엄마가 살던 고향은 더 이상 구심점이 되지 못했다. 산소만 다녀가겠다는 동생은 서운함을 담아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다. 명절날이면 속속 모여들던 엄마의 작은 집이 그렇게도 큰 줄을 미처 몰랐다. 복닥거리는 풍경은 웃음이 새어 나올 만큼 정겨웠다. 틈틈이 만들어 놓은 엄마의 음식을 걸귀처럼 먹어대며 감탄한 날이 있었던가. 캄캄한 어둠 속에서 갈팡질팡하는 형제들은 길 잃은 배 같았다. 늘 그 자리에서 자식들을 맞이하던 엄마의 부재는 한곳에서 태어나 끈끈하게 아껴주던 형제들의 균열을 예고하는 듯했다. 그 막막함은 암흑 속에서 나침반도 없이 항해를 떠나는 배와 다르지 않았다. 거북하고 군색한 마음을 숨기며 어르고 달래서 한 발씩 물러나 앉았다. 서로의 속마음을 알아주었다. 논의 끝에 어느 숙소를 빌려서 하룻밤을 보냈다. 쭉쭉 뻗어가는, 그리하여 인간이 볼 수 없는 한계를 넘어서는 등대 불빛 같은 관심과 이해가, 꺼져 버릴지도 모르는 형제간의 동력을 불어넣었다. 자식은 어미를 여의고 길을 헤매었지만 백성들은 나라를 잃고 깊은 혼란에 빠졌다. 억압받던 세월 동안 등대는 암흑 속에서 불빛을 쏟아냈지만, 어두움을 걷어내고 광명을 찾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렸다. 땅덩어리를 빼앗긴 압제의 시대와 부모를 잃은 설움은 똑같이 천붕(天崩) 아니겠는가. 엄마는 밀려들어 오는 가난으로부터 어린 자식들을 지키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깊은 밤에도 보초를 서듯 뜨개질 코를 한 땀 한 땀 걸어 올렸다. 거친 파도와 세찬 바람은 인간 세상에도 모질게 닥쳐왔다. 바다는 잔잔하다가도 다시 끝날 것 같지 않는 폭풍으로 으름장을 놓았다. 되풀이되는 고초를 온몸으로 저항한 엄마를 떠올리니, 울퉁불퉁한 바위섬 위에서 철썩철썩 때리는 모진 파도를 맞는 것도 등대와 다름없어 보인다. 할 수만 있다면 나도 등대를 닮은 어미가 되고 싶다. 시름겨웠지만 길잡이 노릇을 포기하지 않은 모성을 본받고 싶다. 새로운 파도가 날마다 인사하고 보름달에 부푼 검푸른 바다가 은빛으로 일렁댈 때, 불빛으로 길게 손을 내밀어 길 잃은 배들을 불러 모으리라. 어머니가 자식들에게 안식처였듯이 항구로 들어오는 배들은 모성의 품을 떠올렸을 게다. 깜박깜박 섬광을 쏘아 올리는 등댓불은 나아가야 할 길을 밝힌다. 모두가 잠든 고요 속에서 홀로 깨어 있는 등대, 검은 도화지를 한 줄기 빛으로 그려내는 풍경은 구원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듯하다. 오래전, 침략과 수탈을 위해 떠나는 배들을 지켜보았던 불의 탑이 이제는 지나가는 배들의 무사안녕을 기원하고 있다. 항구에서, 방파제에서, 바위와 풀과 바람에 저항하며 서있는 몇 그루 소나무와 함께 풍경 속에 자리 잡았다. 제국의 등대는 한 세기를 흘러 낭만의 등대로 다시 태어난 걸까. 더러 청춘 남녀가 등대 기둥에 기댄 채 눈빛을 주고받으며 사랑을 새기는 곳이기도 하다. 정열에 불타는 투우사의 망토를 닮은 빨간 등대는 오른쪽 방파제를 지킨다. 순결한 조선의 흰 치마저고리를 닮은 하얀 등대는 왼쪽에 서서 녹색 불을 밝히며 신호를 준다. 앙증맞은 병아리를 닮은 노란 등대는 작은 배들이 자유롭게 드나드는 것을 바라본다. 하늘의 푸른 물이 뚝뚝 떨어져 바닷물이 되었을까. 수평선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은 맞닿아 원이 되겠지. 새빨간 지붕을 머리에 인 등대 속을 빙빙 돌고 돌아 오른다. 어느새 꼭대기에 다다라 푸른 바다와 갈매기 그리고 배들과 눈을 맞춘다. 낮에는 태양 아래 한없이 겸손해지고, 밤이 되면 도저한 불빛은 바다 위로 뻗어나간다. 세상의 격랑을 오랜 세월 동안 겸허히 바라보는 등대. 본래의 바탕이던 바다 위를 생존하기 위해 떠도는 이들을 인도하는 등대를 어찌 구도자라 하지 못할까. 시냇물이 흘러 강물이 되고 굽이굽이 떠내려가 바다로 모여든다. 그 넓은 바다가 흙탕물 맑은 물 가려 받아들이는 적 있던가. 우여곡절 끝에 바다로 들어간 물은 땅의 속살 깊숙이 실개천을 따라 거슬러 올라, 원초적 생명의 탄생을 그리워한다. 그곳의 경계에는 언제나 등대가 있다. 어버이가 그러했다. 세상으로 내보낸 자식들이 당당한 어깨로, 단단한 두 다리로 살라고 하는 것 같다. 쓸려나간 파도가 다시 밀려오는 까닭은 아마도 그 뜻을 알려주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희망을 잃지 말라고, 용기를 가지라고 등대를 향하여 파도가 쉼 없이 손짓을 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