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언어 / 강병기
요즘 지하철의 패륜 이야기가 인터넷상에 많이 돌아다닌다. 막말과 폭행이 주류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사정을 모르는 나로서는 함부로 말할 일이 아니지만 속상할 때가 많다. 노약자를 보호하고 공경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며 자란 우리들 세대라면 비슷한 심정이 아닐까 싶다. 어른들의 앞길을 막아서는 안 되고, 자리를 양보해야 하고, 공손하게 대답해야 하고, 눈을 마주쳐서도 안 되고… 안 되는 것과 해야 하는 것을 상식과 도리로 알고 자란 세대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사회가 된 것 같다. 그 시절에도 속상한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전날 밤 밤잠을 설치면서 시험공부를 한 탓에 버스에 앉아서 졸린 눈을 떴다 감았다 하다가 자는 척한다는 핀잔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나야 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친구들이랑 까불고 장난치다 어른들의 몸에 부딪히거나 발을 밟는 경우에는 ‘경망스럽다’든지 ‘조심성 없는 아이’로 혼나기도 했다. 그래도 아무 말 못 하고 죄송하다면서 고개를 숙이고 물러서야만 했다. 이웃 어른이라면 이해가 갈 법 하겠지만 생판 모르는 남에게도 그랬다. 집을 나서면 ‘본 바 있는 집안의 자손’으로서 행동해야만 하는 보이지 않는 족쇄를 늘 차고 다닌 셈이다. 연장자라면 설령 남일지언정 부모나 형을 대하듯 해야 하는 것이 도리이고 상식이었다.
어린 시절, 집안에서건 동네에서건 초상이 나면 친척이나 동네 여인들의 울음소리가 초상을 치르는 당사자들만큼 서러웠다. 아이고, 우짜몬 좋노, 이래 가실 줄 우예 알았노, 아까바서 우짜노…. 그들은 남의 서러움을 나의 서러움으로 받아들임으로써 함께 사는 공동체를 확인하곤 했던 것 같다. 요즘 세상에는 그 ‘우리’라는 개념이 안개 걷히듯 걷혀버린 것 같다. 안개가 걷히면 ‘내’가 확실히 드러나고 ‘세상’이 더 뚜렷하게 보일 법한데도…, 하지만 ‘나’라는 것이 어디 완전한 것이던가, 오히려 불완전한 인간의 모습이 지나치게 드러나면서 더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미국 뉴욕 주 어느 시골 마을 스쿨버스 안내-안전감시자 할머니에게 중학생들이 모욕적인 언사를 사용한 것이 문제가 되고 있다고 한다. “어떻게 그렇게 뚱뚱할 수 있어요” “당신 집 앞에 오줌을 싸버릴 거다” “당신 가족은 모두 자살했고, 당신 곁에 있으려 하지 않았다” 등등의 말들. 10대 초반의 철없는 아이들이라고 하지만 사람에 대한 배려라고는 전혀 느낄 수 없다. 함께 타고 있던 한 아이가 이 광경을 찍어서 유튜브에 올렸고, 급기야 사흘 만에 조회 수 200만을 넘겼다고 한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네티즌과 미국민들의 분노를 자아냈고, 부모와 학생들이 사과를 했고, 네티즌 성금도 많이 거두어졌다고 한다. 뚱뚱한 것이 죄가 되고, 슬픈 가족사가 업장이 되어 아이들의 놀림을 당한 것이다. 공동체로서의 ‘우리’는 없어지고 그 노인을 놀리고 모욕하는 어린 무리들의 ‘우리’만 남았다. 하지만 건강하지 못해 보이는 사회에서 건강한 무리들이 잘못된 ‘우리’들을 힐책하고 공동체로서의 ‘우리’를 회복하려는 움직임을 보인 것이다. 생판 모르는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고 있을 때 그 잘못을 지적하면서 조언을 마다하지 않았던 지나간 시절의 우리 사회처럼. 남이 잘못되면 같이 마음 아파하던 그 시절처럼.
『좋은 글』이라는 책에서 나온 이야기가 있다.
어느 겨울, 눈이 쌓인 강원도 깊은 골짜기를 걷고 있던 두 사람. 한 사람은 미국 노인이고, 한 사람은 젊은 한국인이었다. 그들은 한참을 헤맨 끝에 어느 무덤가에 이르게 된다. 노인이 말한다. 이곳이 네 어머니 무덤이다! 그리고 회상한다. 육이오 전쟁 시, 그 골짜기를 지나던 병사-그 노인-가 후퇴를 하던 도중 어린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게 된다. 울음소리를 따라갔더니 눈구덩이가 보였고, 그 속에는 알몸의 젊은 여인이 자신의 옷으로 아이를 감싸고 아이를 끌어안은 채 죽어있었다. 그 군인은 언 땅을 파서 여인을 묻고 아이를 데리고 가서 자신의 아들로 키웠노라고. 이야기를 들은 청년은 무덤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다가 벌떡 일어나서는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하나하나 벗으며, 무덤의 눈을 손으로 치우면서 그 옷으로 무덤을 덮어나갔다. 마침내 알몸이 된 청년은 무덤 위에 쓰러져 통곡을 한다. “어머니, 그날 얼마나 추우셨어요!”
나는 그 글을 읽으면서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난 후, 그가 다시 찾아왔던 기억이 있었다면 모르지만, 그 무덤을 어떻게 찾을 수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글을 읽으면서 아들이 옷을 벗고, 무덤을 덮고, 어머니! 그날 얼마나 추우셨느냐, 고 통곡하는 장면이 눈에 선하게 그려지면서 눈물은, 내 몸은, 내 마음은 나의 그런 의식을 배반하고야 말았다. 두 번을 읽고 열 번을 읽어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생각했다. 어린 시절 몸으로 익힌 정 때문일까, 아니면 인간의 본능 속에 정말 측은지심이 들어있는 것일까. 언어란 것은 입으로 내뱉은 것만이 모두가 아니다. 몸으로 아는 것도 언어다. 내가 아는 이 몸 언어가 다음 세대를 이어갈 아이들에게 그대로 존재할까 궁금했다. 그리고 다음 세대에도 또 그다음 세대에도 끊이지 않고 그런 몸 언어가 이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지하철의 패륜이라든지 통학버스 할머니 사건이라든지 인간의 가치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일이 극소수의 일이기를 바랐다. 어쨌든 세상은 변해갈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세상이 변한다고 하더라도 의식보다 정에 반응하는 몸 언어만은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내 마음이 지나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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