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 휴게소에서 / 이향아
차가 출발한 지 한 시간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아직 휴게소에는 들르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서천휴게소에서만은 꼭 쉬었다 가자고 하였다. 그는 내가 왜 ‘꼭’이라고 힘주어 말했는지 안다는 표정이었다.
서해안 고속도로가 뚫리면서 서천휴게소가 새로 생겼다. 서천휴게소에서 바라보면, 포개어진 산세가 유난히 순후하고 능선이 비단 폭처럼 부드럽게 흘러내린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억지일 수도 있다. 우리나라 어디를 가나 거기가 거기, 똑같은 풍경일 뿐 별로 다르지 않다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맞을는지도 모른다.
나는 동서남북으로 방향을 바꾸어 휘돌아보기도 하고, 눈을 가늘게 떠서 스며들 듯 먼 골짜기를 바라보기도 하였다. 안개 같기도 하고 이내 같기도 한 산허리의 보라색 휘장이 지는 햇살에 잠겨 서럽도록 아름다웠다. 나는 마치 거기서 할아버지의 흔적을 찾아내려는 듯이 오래오래 머물러 있었다. 내 태를 묻어둔 곳은 어디쯤일까.
본적지나 출생지를 밝히라면 ‘충남 서천’이라고 쓴다. 그러나 그렇게 쓰고 나면 개운치가 않다. ‘군산에서 성장’이라는 말을 덧붙여야만 비로소 제대로 완성한 기분이 든다. 서천에서 태어났지만 서천 말을 하면서 자라고 우정을 맺고 그 산천을 배경으로 부대꼈던 기억이 내겐 없다. 서천은 내게 그리움과 낯설음이 교차되는 고향이다.
요즘처럼 모든 서류들이 전산으로 처리되지 않았을 때, 어머니는 군산에서 배를 타고 서천군 문산면 면사무소에 가서 호적등본이나 신원 증명서를 떼곤 했다. 그러나 면사무소까지만 가고 신농리 409번지, 그 안창까지는 들어가지 않고 되돌아왔다고 했다. 아직도 오촌 당숙모와 그 후손들이 몇 살고 있지만 급한 일이 생기기 전에는 찾아가기가 그리 쉽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식구들 ―큰아버지, 고모, 할머니를 포함한― 은 아주 일찍 서천을 떠나왔다. 그건 아마도 할아버지의 죽음과 관련이 깊을 것이다. 전에는 그런 일을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는데 요즘에 와서는 조금씩 윤곽이 잡힌다. 나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뵌 적이 없다. 아버지의 보통학교 졸업사진을 보면 다른 사람들이 모두 검정 두루마기를 입었는데 아버지만 홀로 흰 두루마기를 입고 있다. 그때 이미 할아버지와 사별하고 상복을 입었음을 증명하려는 듯이.
우리 집안에서는 할아버지의 말을 꺼내지 않는다. 아버지는 물론이고 고모도 큰아버지도 당신들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늘 함구하여 왔었다. 알고 싶지도 않고 알 필요도 없는 그 윗대의 조상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그들이 얼마나 눈부신 벼슬을 했는지 상세하게 나열하면서도 정작 할아버지에 이르러서는 흐지부지 말을 맺곤 하였던 것이다. ‘신의주 감사를 하셨느니라.’ 너무나 간단히 끝을 맺었으므로 나는 조상 전체의 족적들까지도 허풍을 떨어 과장한 것처럼 우습게 들렸다.
“느이 할아버지가 죄를 많이 지어서 너희들이 요 모양, 요 꼴로 고생을 한다.”
겨울방학에 내려오면서 천안 큰댁에 들렀을 때였다. 무슨 일론지 큰아버지와 다투던 큰어머니가 또 할아버지를 들먹이기 시작하였다. 늘 들어서 외울 수도 있는 말이었다.
“남들은 그보다 못한 벼슬을 했어도 실속을 차렸다더라. 느이 할아버지라는 양반은 자식을 위해 무엇 하나 한 일이 없어. 말년에는 광산을 한다고 있는 재산까지 몽땅 털어먹고 겨우 고향으로 내려와서, 누가 좀 시원찮은 짓만 저질렀다 하면 ‘저놈을 묶어서 죄를 물어라, 곤장을 쳐라’ 했으니 끝이 그렇게 흉했지.”
‘끝이 그렇게 흉했지’라는 말은 전에 듣지 못했던 새로운 구절이었다. 내가 수상하여 돌아보기도 전에, 큰어머니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쏟아버렸다.
“오죽하면 불에 타죽었을까?”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릴 수조차 없었다. 나 말고 곁에 다른 누가 있어 이 말을 들었을까 걱정이 되었다.
“나는 열다섯에 시집을 와서 소상하게 알지만 느이 엄니는 막내라서 아무것도 모른다.”
큰어머니는 아마 나를 자기편으로 알고 있나 보다. 왜 나를 자기편이라고 생각할까? 선조들의 업적이 나열될 때마다 내가 큰아버지에게 대들었기 때문일까?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건데요? 현재가 형편없는 사람들이 과거의 영광을 들먹거려요,’ 내가 큰아버지 말끝마다 토를 달고 나서곤 했으니까, 큰어머니가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하다.
‘저년이 장차 무엇이 되려고?’ 큰아버지가 역정을 내도 나는 무섭지 않았다. 큰아버지는 나를 ‘전라도년’ 이라고 불렀다. 내가 군산에 떨어져 살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 말에는 일 년에 한두 번 볼까 말까 소원해진 조카에게 미안해하는 감정이 숨어 있었다. 큰아버지는 그래서 농을 걸듯이 ‘전라도년’이라며 나를 자극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큰아버지를 만만하게 여겼다. 그의 무위도식이 싫었고, 대책이 서지 않은 한량기가 싫었다. 근근이 살아가면서도 떨쳐버리지 않는 바람기가 싫었고, 허공에 집을 짓듯 가당치 않은 욕망들이 싫었다. 큰아버지에게는 되는 일이 없었다. 정말 할아버지가 지은 죄 때문일까?
그러나 할아버지의 사인을 알고 난 뒤 나는 형용할 수없이 이상한 기운, 신비한 에너지, 지하로 흐르는 냇물 소리 같은 야릇한 리듬을 느꼈다.
‘오죽하면 불에 타죽었을까?’
나는 할아버지가 견뎠을 최후가 고통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가 태양계의 합창과도 같은 웅장한 오케스트라 속에서 장엄하게 산화했을 것이라고 믿는다. 아궁이 앞에서 낙엽을 태우다가 실수했다는 말은 할아버지를 모르는 무식한 표현인 것이다. 할아버지는 아름다운 불의 제례, 조로아스터가 불꽃 앞에서 생명을 진설하듯이 의식을 거행하였을 것이라고. 백수광부가 아내의 만류를 못 들은 척 술병을 들고 강물에 빠져들었듯이 할아버지는 피어오르는 화염의 축제에 잠겨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조선조 말기, ‘생명의 위험에 처한 친구를 무작정 옹호하다가 삭탈관직을 당했다’는 할아버지가, ‘돈을 빌려줄 줄은 알아도 되돌려 받을 줄은 몰랐다’는 할아버지가, ‘아무런 계산도 술수도 없이 광산에 손을 댔다가 여지없이 속아 넘어간 세상 물정에 더딘 할아버지’가 피어오르는 화염의 아름다움에 도취하였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할아버지는 유미주의자, 쾌락주의자, 그의 시적 유전인자는 얼마나 뜨겁게 내 속에 흐르고 있을까. 나는 문득문득 그의 숨결을 느낀다.
나는 원래 아궁이를 좋아했다. 집안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불을 때는 일을 자청했었다. 짚이든 장작이든 솔가지든, 피어오르는 불꽃을 바라보면서 그 향기와 열기를 쪼이고 있노라면 속으로 흐르는 깊은 물소리를 듣는다. 그것은 남이 모르는 즐거움이었다. 나는 지금도 페치카가 있는 집에서 살고 싶다는 열렬한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산 너머 멀리까지 산이 겹쳐진 서천 휴게소 골짜기를 더듬어 내려다보았다. 우리가 걷던 길은 어디쯤일까, 방향도 잘 모르겠다. 해방이 되던 해, 우리는 하얼빈에서 서천까지 왔었다. 맨 주먹을 쥐고 만주에서 돌아왔었지만 며칠 쉬지도 않고 서둘러 고향을 떠났던 것 같다. 다른 것은 다 잊어버렸는데 기찻길을 따라가다가 철로 아래로 시퍼런 강물이 흘러서 무서웠던 기억만 강하게 남아 있다.
서천휴게소는 한산했다. 상품 진열장을 둘러보아도 특별히 살 만한 물건이 없었다. 그냥 나오기가 섭섭하여 아직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가락국수를 시켰다. 뜨거운 국물이 목구멍으로 넘어갈 때 국물이 아닌 뭉클한 덩어리가 넘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상하게 슬퍼서 무슨 핑계라도 있으면 거기 엉겨 붙어서 울고 싶었다.
해는 거의 넘어가고 있었다. 나는 다시 자동차에 올라탔다. 마치 생애 최초로 광야를 향한 첫걸음을 내딛는 듯 세상이 한없이 넓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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