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를 옮겨 심고 / 안재진
며칠 전, 어머니 산소에 들렀다가 돌아오는 길에 소나무 한 그루를 캐어 화분에 옮겨 심었다. 말이 소나무지 실은 저 지난해쯤 씨앗이 떨어져 싹을 틔었는지 젓가락 굵기에 불과한 어린 나무다.
사실 본의 아니게 이주를 해야 하는 나무의 입장에서는 결코 바람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아래 위층으로 다닥다닥 붙어살지만 이사 나누는 것조차 인색할 정도로 인정이 단절된 채 살아가는 주민들의 분위기가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고, 엷은 시멘트 칸막이 저편에서 울려오는 아이들의 발소리와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가 신경을 날카롭게 몰아가니 말이다. 그것만도 아니다. 집안 분위기도 그리 편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늙으신 계모와 외출이 잦은 막내딸과 살다 보니 온종일 산사의 낡은 암자처럼 그날이 그날처럼 음산하고 적막하기만 했다.
때문에 동물병원을 하는 아이가 강아지라도 한 마리 키우는 게 어떠냐고 물어 왔다. 사람이나 세상도 지극히 사랑하지 못하면서 강아지를 마음에 담고 수선을 피울 수 없다는 게 내 평소의 감정이다.
그래서 몇 포기 화초를 가꾸고 있었는데 이번에 소나무 한 그루까지 더하게 되었다. 물론 처음부터 마음먹고 소나무를 탐한 것은 아니었다. 가끔 마음이 답답하거나 울적할 때는 어머니 산소를 찾게 되는데 어느 날 우연히 쳐다본 소나무가 왜 그렇게 마음을 설레게 하는지, 마치 수십 년 전에 떠나신 어머니가 무덤을 허물고 일어선 것 같은 환영을 느낀 것이다.
내가 철이 들 무렵 어머니 산소는 나무 한 그루 없는 삭막한 민둥산이었다. 그래서 수십 그루의 어린 묘목을 구해 심었는데 생각보다 잘 자라 삼십여 년이 지난 후에는 제법 무성하게 우거지고 널찍한 그늘까지 이루게 되었다. 숲이 이루어지니 새들도 날아들고, 어디서 옮겨왔는지 진달래, 망초 꽃도 피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전보다 더 즐겨 이곳을 찾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숲만이 좋아 찾아가는 것은 아니었다. 어린 시절 어렴풋하게 가슴에 묻어 둔 어머니의 기억은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간절하여 비록 덩그런 흙더미로 남아 있지만 짬만 있으면 나도 모르게 발길이 옮겨지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다 자란 소나무에서 어머니의 환영을 느끼게 되었고, 그 영상을 잊지 않으려 더욱 애를 썼다.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들렀을 때는, 내가 죽으면 화장을 하여 지금 이렇게 앉아 꿈을 꾸고 있는 소나무 그늘에 흔적 없이 묻어달라는 부탁까지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소나무는 옥색 치맛자락을 나부끼며 친정 나들이 길을 돌아오는 어머니의 모습과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비바람이 불거나 눈보라가 몰아쳐도 언제나 의젓하고 유연한 품위, 숱한 세월 속에 맞닥뜨린 삶이 아픔처럼 덕지덕지 눌어붙은 소나무의 껍질 또한 어머니의 인생과 너무나 닮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산소 옆 풀밭에 반듯이 누워 소나무와 어머니, 푸른 하늘과 스치는 바람,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것들과 어울려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대화를 하는 것이다. 어떤 때는 시간이 정지된 듯 초연히 어정거리다 달빛을 불러들이는 부엉이 소리를 듣고야 돌아선 일도 있다.
아이가 성장하면 어른이 되듯 그때 심은 소나무가 씨앗을 떨어뜨렸는지 아이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던 짐승이 우연히 배설한 씨앗이 움을 틔었는지 젓가락 굵기의 어린 소나무가 이곳저곳에서 자라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돋아난 어린 소나무 하나하나에도 어머니의 기억을 심기에 열중했다. 나중에는 그들 나무가 모두 어머니가 되어 무슨 군중대회처럼 나를 반기는 환상을 하기도 했다. 때문에 나는 그곳을 더욱 잦은 걸음으로 찾게 되었고, 나중에는 한 그루쯤 집으로 옮겨 심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바로 그 생각을 조심스럽게 실현한 것이다.
어린 소나무는 베란다 한편에 함초롬하게 자리를 잡고 날마다 나를 기쁘게 만들어 준다. 오! 아리따운 모습이여, 파아란 웃음을 머금은 채 숱한 이야기를 풀어내고, 멀게만 느껴졌던 그 세월과 그리움의 연민을 한 편의 서사시를 읽고 있는 듯한 모습은 내 마음을 설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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