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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6

[좋은수필]백년의 사랑 / 김종회

백년의 사랑 / 김종회

 

 

“사람이 어떻게 죽을 것이냐 하는 문제는 곧 어떻게 살 것이냐 하는 문제와 같다.”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2000년 9월에 유명(幽明)을 달리한 필자의 스승 황순원 선생께서 생전에 자주 하시던 말씀이다. 죽음의 순간은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 전체를 반영한다. 다가올 죽음을 걱정하기보다는 남아 있는 삶의 나날에 정성을 다하는 것이 오히려 두려움을 넘어서는 길이 된다는 뜻이다. 생전의 언표를 실천하듯 〈탈〉, 이후 황순원의 후기 단편들은 죽음이라는 주제를 치열하게 탐색한다.

말년의 선생께서는 이 땅에서 수(壽)를 다하고 세상을 하직할 때, 가족이나 주위에 폐 끼치지 않고 갈 수 있도록 기도한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평생을 해로한 부인 양정길(楊正吉) 여사와 함께 서울 사당동에서 살 때, 두 분의 모습은 한 쌍의 단정(丹頂) 학(鶴)처럼 고고했다. 단정 학은 황순원의 수발(秀拔)한 단편 〈학〉에 등장한다. 20세기의 끝자락인 1990년대 말, 두 분은 매일 근처의 삼일공원을 산책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한 후 잠자리에 드셨다. 어느 하루, 그렇게 편안하게 주무신 선생께서는 그 모습 그대로 정갈하게 천국으로 가셨다.

생전의 선생께서는 아내의 보살핌이 없었더라면 자신의 문학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술회했다. 아울러 그 절반은 아내의 몫이라고 선언하듯 말했다. 데뷔작으로 일컬어지는 시 〈나의 꿈〉 이후 시 104편, 단편 104편, 중편 1편, 장편 7편에 이르는 황순원 문학의 집적 뒤에는 그 같은 뒷받침이 숨어 있었다.

두 분은 1915년 생 동갑이다. 방년 20세가 되던 1935년 1월, 숭실중학을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 제2고등원으로 유학한 선생과 나고야 금성여자전문의 학생이던 부인은 일생의 반려자로 출발했다.

평안남도 숙천에서 과수원을 경영하며 만주 봉천에 사과를 수출하기도 한 양석렬(楊錫烈)의 장녀인 신부는 평양 숭의여학교를 다닐 때 문예 반장을 지냈고 선생과는 이때부터 교제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문학적 재능과 소양을 가진 이들의 연애결혼이었다.

선생의 문학이 신앙심이 깊고 활달하며 무엇보다 문학에 조예를 갖춘 부인의 조력을 비길 데 없는 원군으로 얻게 된 셈이다. 그 부인은 말년의 선생에게 늘 “이제 천국을 소유하셨다”고 축복했다.

선생께서 먼저 떠나신지 14년이 된 지난 9월 5일, 마침내 그 부인도 그렇게 그리워하던 남편이 있는 곳으로 가셨다. 향년 99세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장구한 세월이었다. 월남 실향민의 가족으로 남한에서 자리 잡고 사는 일, 전란의 포화를 피해 부산에서 피난살이를 할 때의 곤고함, 3남 1녀의 세 자녀를 키우고 그 사회적 성취를 북돋운 수고, 신앙인으로서 보이지 않는 곳의 어려운 이들을 도우며 산 100년의 인생이 거기 있었다.

“때로는 소설가 황순원의 부인으로 사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는 고백도 있었다.

두 분이 함께한 세월 65년, 먼저 간 선생을 기리며 산 세월 14년은 이제 시대사의 갈피 속으로 묻혀갈 것이지만, 한 시대의 징검다리를 함께 건너온 두 분의 이야기는 많은 이들에게 ‘백년의 사랑’으로 남아 있다.

지금도 필자는 사당동 아파트 앞길과 가끔 모시고 다니던 양평 소나기마을의 들녘이 눈앞에 떠오른다. 그 음성도 들린다.

“김 교수, 미운 사람 떡 하나 더 주어라. 내가 김 교수에게 소나기마을을 맡긴 것은…”

어느덧 작가 황순원과 그 부인을 함께 모시고 많은 사람들에게 동심의 순수성과 마음의 안식을 회복하게 하려는 소나기마을은 필자에게 소중한 사명이 되었다.

두 분 묘역에는 다음과 같은 묘비명이 새겨 있다.

“20세기 격동기의 한국문학에 순수와 절제의 극을 이룬 작가 황순원 선생(1915-2000), 일생을 아름답게 내조한 부인 양정길 여사(1915-2014), 여기 소나기마을에 함께 잠들다.”

초가을의 싱그러운 햇살과 삽상한 바람결 속에, 방문객들의 발걸음이 분주한 가운데, 다시 함께 자리한 두 분의 대화가 사뭇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