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5936) 썸네일형 리스트형 [좋은수필]마지막 손길 / 고경남 마지막 손길 / 고경남 "재수 없어." 백혈병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아이가 혼잣말로 중얼댔다. 상담실에 아빠와 같이 앉아 있던 아이는 짜증 난다는 말투로 물었다."그럼, 암이네요?" "일종의 암이기는 한데, 혈액에 나쁜 세포들이 늘어나는 악성 질환이야. 혈액암이라고도 하는…." "암 맞네요. 진짜, 재수 없네." 내가 당황한 표정을 짓자 옆에 있던 아빠가 목소리를 높였다. "너,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이 선생님 말고, 내가 재수가 없다고. 맞잖아?" 그때 아이의 팔목에 새겨진 조그마한 나비 문신이 눈에 들어왔다. 평범한 아이는 아니구나.아빠는 고등학생 딸이 백혈병이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나타나게 마련인 놀람과 불안과는 다른, 좌절과 피로의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 [좋은수필]오른손잡이와 왼손잡이 / 최장순 오른손잡이와 왼손잡이 / 최장순 산책길의 천변, 잠을 자는 오리의 모습이 모두 물음표다. 문득 왜 그들은 외로 목을 틀고 잠을 자기를 고집하는지 궁금했다. 그러다 가만히 살펴보니 무리 중 오른편으로 고개를 튼 놈도 더러 보였다. 아니, 아예 부리로 중심을 잡는 듯 편안한 자세로 앉아서 잠자는 놈도 있었다. 고개를 외로 틀고 외다리로 서있는 놈들은 분명 나의 눈에는 불편해 보였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들이 외로 고개 틀고 한 다리로 서서 자는 것은, 오른손에 익숙하고 두 다리로 서야 편안한 나의 습관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사람의 열에 아홉이 오른손잡이라고 한다. 9할의 우수자右手者가 지배하는 사회라는 통념을 갖는 것은 나와 같은 오른손잡이의 고정관념일 뿐이다. 왼손은 오른손의 보조역할일 뿐이며 오른.. [좋은수필]돈과 행복은 얼마나 친할까 / 서숙 돈과 행복은 얼마나 친할까 / 서숙 내 천성에는 약간의 트위스트가 들어있다. 액면을 뒤튼다. 가령 누군가가 돈이 행복의 전부가 아니라고 기염을 토하면 나는 신속한 결론에 닿는다. 아하, 저 사람은 돈에 과도한 집착을 보이는군. 또는 어떤 이가 돈, 그거 좋지요, 웃으며 말하면 저 사람이야말로 돈의 과부족에 그다지 구애받지 않을 사람이로구나, 적어도 돈에게 행복을 구걸하지는 않겠는걸, 혼자서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이런 직감이랄까 어설픈 진단이 종래에 그럭저럭 맞아떨어지는 경우에 당도하여 반어적 심리탐색에 확신이 쌓여만 간다. 사람들은 유독 돈에 대해서 이중적이거나 위선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나의 아버지는 재물을 쌓는 삶을 경원시하여 당신의 여유를 가까운 사람들과 나누며 살고자 했다. .. [좋은수필]어탁 / 제은숙 어탁 / 제은숙 훤칠한 붕어가 목상에 누웠다. 입을 벌리고 희멀건 눈을 뜬 채 초점도 잃었다. 목욕재계 마치고 꼼꼼히 물기를 닦았으나 황망히 떠나올 적 입었던 비늘 옷 그대로다. 몸은 축 늘어졌으되 유선형의 몸매가 매끈하고 지느러미는 한껏 펼친 모양으로 줄에 엮여 고정되었다. 거칠게 치뻗은 모습이 펄떡거렸을 생명의 움직임을 감지하게 한다.가지런한 비늘 위로 차가운 물감이 덮인다. 생전의 몸피와 흡사한 색으로 배합되었다. 붓으로 드문드문 안료를 올리고 색깔의 틈이 부드럽게 이어지도록 공을 들인다. 지느러미 사이도 놓치지 않고 촘촘히 공간을 채운다. 이승의 마지막을 곱게 화장化粧시키어 생기를 불어넣는다. 몸단장이 끝나면 물을 뿌려둔 정갈한 한지를 덮어 꼼꼼하게 누른다. 마르기를 기다리면 겉피에 남아있던 습.. [좋은수필]은하수를 덮고 모래밭에 누워 / 이향아 은하수를 덮고 모래밭에 누워 / 이향아 퇴직을 하면 실컷 여행을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초등학교 4학년 사회 시간에 배운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 중국의 황하 유역, 이집트의 나일강 유역, 메소포타미아의 유프라테스강 티그리스강 유역, 인도의 인더스강과 갠지스강 유역… 이름을 줄줄이 외우면서 찾아갈 날을 기다렸다. 그래도 실크로드를 여행한 것은 생각할수록 잘한 일이다.돈황의 막고굴莫古窟을 향해서 버스가 일직선으로 뻗은 길을 3시간이나 달릴 때 시야에는 온통 사막밖에 없었다. 나는 지평선, 지평선이라고 소리 내어 읊었다.막고굴에 도착하여 떠나온 지 일주일 만에 집으로 전화를 했다. 간밤 꿈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집은 모두들 무사하다고 했다. 그날 오후 다섯 시 명사산에서 낙타를 타기로 되어 있기.. [좋은수필]감실부처 제행무상을 역설하다 / 신홍락 감실부처 제행무상을 역설하다 / 신홍락 시큰둥한 첫 만남이다. 왕방울 눈을 지닌 감실부처를 건성으로 일별하고 돌아 나오는 뒤통수가 간지럽다. 향토 사학자 수준으로 설명하는 친구의 유식에 주눅 들어 딴청 부린 것이 부끄러워 발길을 멈춘다. 뒤돌아서 두 손을 모은다. 감실 안을 비추는 햇빛에 반사된 희미한 미소가 찌뿌둥한 마음 근육을 풀어준다. 민망한 여운이 오래 머문다.절 마당에 들어서면 마음이 편안해지지만, 전각 안쪽을 삐끔삐끔 들여다보고는 뜨락만 어슬렁거렸다. 찰나를 견디지 못하는 삿된 생각이 들락거리니 낯부끄러운 염치에 법당 주위만 맴돌았다. 남의 손에 이끌려 까치발로 들어가서도 지은 업의 무게에 눌려 조아린 육신을 일으킬 힘이 없음을 핑계 삼았다. 불교 경전에는 문외한이라 석가모니는 고사하고 나무.. [좋은수필]몇 초의 포옹 / 조남숙 몇 초의 포옹 / 조남숙 ‘폐허는 사람이 없어야 폐허가 된다. 역사의 한 부분을 떠들썩하게 채워 넣던 도읍지였을망정 인걸이 간데없어지면 폐허가 된다’(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 / 서현 지음 / 효형출판, 2014)는 문장에서 폐허를 생각한다.사람은 공간에 에너지를 채워 넣는 중요한 유기체다. 유기체는 공간에 모여 구분 불가능한 생각으로 이어진다. 공간 속의 움직임을 주도하는 사람의 힘은 달콤하면서 힘이 있다. 사람 구경 할 수 있는 시장이나 백화점, 극장이나 공연장, 그 어떤 장소에서도 사람들의 움직임은 살아있는 우주 그 자체다. 그중에서 움직임이 조용하면서도 역동적으로 다가오는 곳이 계단이다.나에게 세종문화회관은 정신세계의 중심이었다. 화재로 소실된 시민회관의 명맥을 이어 예술의 통로가 .. [좋은수필]그늘에 들다 / 배귀선 그늘에 들다 / 배귀선 시린 겨울을 맨몸으로 품었던 가지, 묵언에 들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물렁물렁한 봄볕으로 제 몸 툭툭 상처 내더니 이내 허공에 푸른 정자 하나 만들어 놓았다. 어느 때부터인가 그러니까 어머니 돌아가신 그 해, 파랑새가 물어다 심었는지 뒤란 언덕바지에 그리움 넌지시 오디나무 한그루가 자라기 시작했다.듬성듬성한 머리로 묵직한 나날을 이고 살았던 어머니, 자식들을 위해 구근처럼 끊임없이 뿌리를 뻗었어야 했을 먹먹한 생이 기억될 때마다 나는 창 너머 오디나무를 바라보는 습관이 생겼다. 무덤에 든 당신의 바람이었을까. 올핸 작년보다 더 많은 오디가 열렸다. 넓은 품을 새들의 쉼터로 내어주고, 겨우내 갈무리한 바람을 풀어 길손의 땀을 식혀주는 이파리들. 그 그늘에서 오디를 따 입에 넣는 .. 이전 1 2 3 4 ··· 74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