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6121) 썸네일형 리스트형 [좋은수필]부석사浮石寺 / 배단영 부석사浮石寺 / 배단영 오후 내내 하늘이 흐리더니 문을 나설 때는 이미 빗방울이 굵어져 있었다. 마른 땅은 빗방울을 훑고 지나가자 흙냄새가 진동한다. 제법 웅덩이마다 비가 차이고 바짓단은 비에 젖은 채 시간이 지나갈수록 무겁게 느껴졌다.주위를 몇 번이나 헤매고서야 그녀가 사는 집이 위치한 골목길로 들어섰다. 돌담과 기와의 처마가 일정하게 연결되어 있어 찾고자 하는 집을 분간하기 어려웠지만, 이 층으로 연결된 계단을 보고서야 그 집을 찾을 수가 있었다. 계단에는 밑으로 흐르지 못한 물들이 제법 고여 있었다. 계단을 오르자 이층집 위에는 낡은 옥탑방이 비에 젖은 채 웅크리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을 서너 번 불렀지만, 빗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녹 쓴 파이프에 매달려 있던 빨랫줄이 바람에 흔들리.. [좋은수필]축항 사람들 / 김철순 축항 사람들 / 김철순 해 지난 파래가 흰 꽃처럼 나풀거린다. 셔터가 한 컷을 건져 올릴 때마다 겨울 바다는 시샘하듯 내 종아리로 짠물을 퍼 던진다. 성큼 뒷걸음으로 물러서다 빠지직 밟히는 소리에 내려다보니 반들거리는 홍합무리가 방파제를 오지게 붙잡고 있다.한때 형산강과 송도 바다가 만나는 곳에 방파제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곳을 축항이라 불렀다. 그 위로 횟집이 하나, 둘 들어서면서 붉고 푸른 천막촌이 이어졌다. 해수면과 같은 천막촌은 물 위에 떠 있는 수상가옥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싱싱한 회 맛도 볼 겸, 좁은 축항 길을 누비며 이 색다른 풍경을 즐겼다. 축항은 파도와 싸우는 바다 사람들 쉼터이고 철강 공단 노동자가 푸념을 늘어놓으면 재충전을 하는 자리이기도 했다.햇살이 좋은 아침이면 자주 축항을 찾.. [수필]대책 없는 병 / 신현식 대책 없는 병 / 신현식 오늘도 한바탕 소란이 있었다. 그 여파로 집안은 종일토록 냉기가 감돌았다. 신 선생 부부는 근래 들어 자주 다투는 편이다. 그럴 나이도 한참이나 지났건만 티격태격한다.신 선생은 수필 강사다. 도서관에서 글쓰기 강좌를 열고 있다. 그것도 이십여 년을 하고 있으니 꽤 오랫동안 하고 있다. 오십 조금 넘어서 시작했으니, 인생 후반은 거의 선생 노릇 하는 셈이다. 그러니 언행言行이 몸에 밸 수밖에 없기도 하다.신 선생 부부도 여느 집처럼 시답잖은 것으로 다툼이 시작된다. 김 여사가 무심코 던진 말에 신 선생이 꼬투리를 잡거나 대꾸를 하여 확산되곤 한다. 가만히 있으면 될 것을 괜한 간섭을 하여 기름에 불을 붙이는 격이다.김 여사는 성질이 급한 편이다. 말이 마음보다 한 걸음 앞서 나오.. [좋은수필]산다는 것은 / 맹난자 산다는 것은 / 맹난자 지축이 흔들린다. 서둘러 개표를 하고 지하철 계단으로 내려갔다. 전동차 앞에 초등학생들이 무리 지어 있다. 붉은 악마의 티셔츠를 입은 아이들, 하늘색과 노란색의 티셔츠를 입은 세 그룹이었다.재잘거리는 소음 때문에 다음 차를 탈까 하다가 그냥 올랐다. 책을 보기는 틀렸다 싶어 경로석에 기대어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와글'대는 소리가 여름밤의 무논 같다. 별안간 고함치는 아이들의 함성에 놀라 눈을 떴다. 왈칵하고 전동차가 급정거를 하며 심하게 흔들렸다. 바람에 누운 풀잎처럼 작은 몸들이 앞뒤로 쏠린다. 낄낄대면서 아이들은 재미있는 놀이처럼 즐거워한다. 그러면서 금세 중심을 잡아간다.서른이 채 안 돼 보이는 여교사들은 능숙하게 아이들을 지휘한다. 청바지 차림의 한 여교사가 검지를 입.. [좋은수필]흐르는 물 / 안 숙 흐르는 물 / 안 숙 동글납작한 돌을 주워 힘껏 물 위에 띄워 본다. 한번 핑그르르 원을 그리고 튀다가 그대로 퐁당 잠기고 만다. 어렸을 때는 돌로 물 뜨는 장난을 즐겨 했었다. 돌을 던지면 널뛰기하듯 튀며 몇 번씩이나 치고 나갔었다. 지금은 팔 힘이 부쳐서인가 한번도 제대로 띄우지를 못한다.흐르는 물을 좋아한다. 새 목을 축일 만큼 졸졸거리는 실개천이든, 동네 어귀를 구석구석 휘돌아 나오는 도랑이든, 흐르는 물이면 좋은 것이다. 물살이 빠르게 여울지는 여울목도 좋았고 멀리 수평선 넘어 무량히 펼쳐지는 망망대해도 좋았다.닿는 대로 지향 없이 떠내려가는 물 위에 시선을 실으면 마음이 가라앉고 응어리가 풀어진다. 끝없이 이어지는 미지의 상념이 좋아 흐르는 물을 좋아하는지 모른다. 그래서 강이나 바다를 바라.. [좋은수필]강물에게 길을 묻다 / 정태헌 강물에게 길을 묻다 / 정태헌 강변에 서서 도도히 흐르는 물살을 바라본다. 강물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무리지어 유장하게 흘러간다. 느릿하게 걷다가도 창창蒼蒼히 달려간다. 때론 소쿠라지고 소용돌이치면서도 강물은 한 가지 열망으로 먼 길을 향한다. 한사코 더 높은 곳으로 가려는 강변 너머의 아우성들을 못 들은 체, 묵묵히 더 낮은 곳으로 향할 뿐이다. 산록의 갈맷빛 물그림자에 몸을 헹구며 흐르기에 더 청징해 보인다.늠실늠실 흘러가는 저 섬진강 강물을 보라. 있는 힘을 다해 바다로 향하고 있지 않은가. 맴돈다고 에돈다고 나무랄 일이 아니다. 해살 놓는 바람에도 잔물굽이만 흔들릴 뿐, 맴돌아도 눈을 뜨고 에돌아도 멈추지 않으며 흐르면서도 해찰하지 않는다. 더디 가니 빨리 가라 등을 떠밀어서는 안 된다. 강물은.. [좋은수필]창문이 건네는 이야기 / 조재은 창문이 건네는 이야기 / 조재은 책상 위로 오랜만에 밝고 따스한 봄볕이 스며들어 창문을 열어 봄을 맞는다. 거넌편 아파트가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그곳에 봄은 보이지 않고 네모난 콘크리트만 연속으로 보인다. 사각의 똑같은 어두운 창들은 침묵하고 있을 뿐이다. 창문에서 같은 표정, 같은 각도로 팔을 올리고 행진하는 나치 군대의 모습이 스친다. 건물 안에는 분명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데 왜 창은 모두 같아야 할까. 베란다 밖에는 화분 하나 없이 콘크리트 덩어리다. 회색의 절망이다.작년 빈에서 석 달을 머무는 동안, 집에서 가까운 훈데르트바서 하우스에 자주 갔다.오스트리아 미술가이며 건축가인 훈데르트바서는 직선의 획일적인 건물을 보면 불행해지고 모두 감옥에 갇혀 있는 듯이 보이고, 너무 끔찍해서 자신마저 싫.. [좋은수필]이판사판理判事判 / 홍혜랑 이판사판理判事判 / 홍혜랑 산사의 겨울밤을 어찌 어둡다 하리. 하늘에 떠 있는 별들이 선명하면 할수록 더 멀리 느껴지는 건 색다른 체험이었다. 멀리 있을수록 그리움이 더한 것이 어찌 별뿐일까. 고개를 하늘로 젖히니 걷잡을 수 없이 허공으로 빨려 들어가는 자신의 몸을 방어할 길이 없다. 별이 나를 마구 잡아당긴다. 살갗에 닿는 청량한 대기 또한 어둠을 씻을 만큼 상쾌하다. 이 무명無明의 영혼에게도 무언가 좋은 일이 있을 것만 같다. 이번 문화유적 답사팀이 숙소를 호텔이나 콘도 대신 절간의 선방禪房으로 정한 것은 참 잘한 일이다.별들과의 만남도 소중했지만 잠시 방문한 과객過客들에게 법문을 허락한 주지스님과의 인연이 있어 이번 여행이 더욱 기억에 남아 있는 듯하다. 일행 중에는 나를 포함한 기독교인이 꽤 많.. 이전 1 2 3 4 ··· 766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