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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1

[좋은수필]눈길 / 김애자

 

눈길 / 김애자

 

      

 

기온이 그렇게 갑자기 떨어지고 눈까지 내릴 줄은 몰랐다. 아침에 집에서 나설 때 까지만 해도 겨울날치고는 포근했고, 볕도 비교적 따사로운 편이었다. 오후로 접어들면서 바람이 일고 하늘에는 서서히 구름이 몰려오는가 싶더니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하늘에는 알 수 없는 풍우가 있고 인생살이에는 예견치 못한 길흉화복이 있다던 말이 정언이었다.

때문에 길을 나서기 전에 일기예보는 필히 알아두어야 한다. 한데 해가 짧은 겨울철이라 새벽부터 부산을 떨고 나선 탓으로 일기예보를 듣지 못했다. 그랬다면 돌아오는 길이라도 서둘렀어야 하는데 산 밖을 벗어나면 늘 시간이 빠듯하다. 산골에서 구하지 못하는 마른 찬거리며, 생활필수품 따위를 챙기는 것도 만만치 않으나 그보다 걸음을 더디게 하는 것은 친구들이다.

산촌에서 느끼는 외로움은 대화의 궁핍에서 온다. 흙과 하늘과 노을과 바람과, 새와 나무와 꽃과 물소리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그것들은 감정의 교류가 없다. 그래서 사람이 그리운 것이다. 상처를 주고받을지라도 사람이 그립고 도시의 문화가 그리워 때때로 일탈하고 싶은 심사가 도발적으로 일곤 한다. 젊은 나이는 아니더라도 가끔씩 친구와 만나서 미술관을 둘러보거나 영화라도 한 편 보고 와야 정체된 일상성에서 오는 지리멸렬함을 털어 낼 수 있다. 그래서 일 년에 서너 번은 청주로 나간다. 청주에 가면 그 하늘, 그 거리, 그 사람들과 그 도시의 문화가 감정의 갈증을 풀어준다. 오늘은 글을 쓰는 친구가 책을 출간하고 모임을 주선한 날이다. 오랜만에 글쟁이들끼리 만났는데 어찌 쉽게 자리를 뜰 수 있겠는가. 이런 날의 식사는 그야말로 대중공양이다. 소곤거리며 속말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왁자하게 떠들고 먹는 자리다. 연신 웃음을 터트리는 분위기에 휩싸여 밖의 날씨에 대한 생각은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신선놀음을 끝내고 나서야 당황하게 되었고 차에 시동을 걸면서부터 걱정이 따라붙었다. 더구나 스노타이어를 끼우지 않았으니 돌아갈 3백 리 길이 아득할 뿐이었다.

거리는 여전히 인파로 넘실거렸다. 하늘에서 육면체와 팔면체로 된 하얀 꽃송이들이 나풀나풀 쏟아져 내리는 아름다운 밤을 즐기기 위해 젊은이들은 밤늦도록 거리로 카페로 몰려다닐 것이다. 꽃의 물결에 부유하듯 떠밀려 시내를 벗어나 외곽으로 들어섰다. 이미 중앙선은 진즉에 없어진 듯싶었다. 제가 알아서 가야만 하는 위험천만의 길이었다. 비상등을 켜고 가능한 브레이크를 밟지 않을 범위의 속도를 유지하기 위해 신경의 촉수를 곤두세웠다. 눈 깜짝 할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기에 앞차의 후미 등을 등대 삼아 조심스럽게 따라붙었다. 하나 그 차는 증평을 지나 괴산쪽으로 갈라지는 분기점에서 오른쪽으로 꽁무니를 틀었다. 갑자기 낭패감과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그토록 자주 다니면서 숱하게 보아 온 풍경들이건만 눈으로 하여 모든 것이 낯설었다. 나풀거리는 눈밭 속으로 천천히 밀려가고 밀려오는 들판과 산과 집과 그 집에서 사는 사람들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다는 단절감이 더 두려웠다. 이 밤에 내가 길 위에서 혼자 생을 마감한다고 해도 눈 하나 깜짝할 사람들이 아니란 것이 나를 숨 막히게 했다.

아주 가끔씩 반대편 차선에서 차가 오기도 하고 옆으로 지나가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도 사지에 내몰린 외로운 병사처럼 복병을 피하느라 절절 맸다. 단절감과 두려움에 떨면서 궁형으로 휘어진 산굽이를 돌아 달천강을 건너 충주에 도착한 것은 청주를 출발한 지 세 시간이 지난 후였다. 평소 한 시간이면 족하던 거리를 세 배나 걸렸던 것이다. 등은 식은땀으로 축축했고 몹시 목이 말랐다. 주유소로 들어가 자판기에서 커피를 한 잔 빼먹고 다시 차안으로 들어왔다. 아직도 집까지 가려면 한 시간은 족히 걸릴 것이다.

다시 시동을 걸고 이번에는 속력을 조금 더 냈다. 거의 차가 끊긴 터라 오히려 운전하기가 수월해서였다. 국도를 벗어나 소재지를 들어서자 비로소 고립감이나 두려움에서 벗어 날 수 있었다. 저수지 굽이를 돌아 당산나무가 있는 마을 어귀로 접어들었다. 멀리 마을 회관의 가로등이 보였다. 마지막 힘을 다해야 저 언덕을 올라갈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농로로 닦은 길이라 노폭도 좁고 경사가 급해 조금만 눈이 내려도 앞바퀴가 헛돌았다. 트럭도 제자리걸음만 하다가 되돌아가기 일쑤인데 앞바퀴로만 힘을 받는 전륜구동인 나의 차는 이 고약한 날씨에 자칫 미끄러져 개울로 처박히기 십중팔구였다. 단전에 힘을 주고 앞을 똑바로 주시했다.

그때 눈 위로 흙이 깔려 있는 것이 보였다. 착시를 일으킨 것은 아닌가 싶어 다시 보았지만 틀림없었다. 그것도 방금 모래를 삽으로 훌훌 뿌려 놓고 간 듯싶었다. 오른발에 적당한 힘을 가하자 차는 거뜬하게 모래를 타고 언덕 위로 올라갔다.

멀리 불빛 속으로 사람이 보였다. 그가 빈 리어카를 끌고 막 집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산 밑 작은 집에는 창마다 불빛이 환했다. 집 안에 있는 전등이란 전등은 죄다 켜놓았던 것이다.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렸을까. 청주에서 출발할 때 전화를 했으니 그는 이제 오려나 저제 오려나 수없이 창문을 열고 내다보았을 것이었다. 외진 산골에서 홀로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쓸쓸하고 따분한 일이다. 그의 쓸쓸함과 따분함과 조바심이 눈에 보였다. 혼자 식탁에서 밥을 먹었을 것이고, 전화기에 수없이 눈길을 보냈을 것이다. 불면을 밝히는 초조함이 자정을 넘자 드디어 리어카에 모래를 퍼 담고 이 길로 나왔을 터였다.

나는 차를 세우고 라이트를 껐다. 아직도 육면체와 팔면체로 된 꽃잎이 나풀나풀 산의 등고선은 물론 온 골짜기며 산마을을 뒤덮고 있었다. 잠시 바람의 현을 타고 일렁이는가 싶더니 다시 수직으로 다복다복 떨어져 쌓였다. 모든 색이 태어나는 흰빛, 그 순결한 성채가 산 밑 작은 집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을 만나 더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빛 속에서 한 남자가 창고에 리어카를 두고 현관문 앞에서 머리와 옷에 묻은 눈을 털고 다시 한번 길 쪽으로 눈길을 돌리고는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눈길에 선명하게 난 리어카와 그의 발자국과 불빛 속에서 움직이는 그의 모든 행동을 지켜보고는 핸들을 잡고 있던 손등에 얼굴을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