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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1

[좋은수필]열쇠 소리 / 염정임

열쇠 소리 / 염정임

 

 

 

 

주택에서 살 때와는 달리 아파트에서 살게 되면서 꼭 필요한 물건이 된 게 열쇠와 아파트용 김칫독이었다. 김칫독은 그 해 가을에 사서 몇 년 동안 쓰고 있으니까 별 문제가 없었지만 열쇠는 가끔 잃어버리기도 하고, 휴대를 해야 할 때 하지 않아 일이 생기곤 한다. 이사와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열쇠를 가지고 나가지 않아 한 시간 동안 문밖에서 다른 식구가 오기를 기다린 적도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외출에서 돌아와서 빈 아파트 열쇠를 꽃을 때에는 항상 작은 염려가 마음 속에서 고개를 든다. 혹시 열쇠를 열려 있으면 어떻게 하나?  또 이 열쇠가 안 맞으면 어떻게 하나? 그러나 열쇠는 항상 제자리에 꽃히면 어김업이 '찰카닥' 문을 열어준다. 나는 그제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는 것이다.
나는 자물쇠와 열쇠가 맞물려 찰카닥 열릴 때의 그 작은 감격 같은 낮은 울림을 좋아 한다. 그건 마치 오랫동안 입안에서 뱅뱅 돌던 어떤 이름이 머리 속에서 번쩍 생겨나는 순간 같기도 하고, 한동안 욕망의 집착에 싸여 괴로워 하다가 하루아침에 탁 털어 버리고 일어서는 순간 마음의 자유로움 같다고나 할까.
언젠가 목욕실이 잠겨서 집의 열쇠란 열쇠를 총동원한 적이 있다. 이것저것 꽃아 보았으나 맞는 것이 없었다. 맞지 않는 열쇠를 찾아서 안 열릴 때의 그 답답함을 어디에다 비기랴. 마치 아무리 뛰어도 제자리걸음인 꿈속처럼 안타까웠다. 그건 또한 지나가 버린 시간의 안타까움만큼이나 절실하다. '그때--- 했더라면 좋았을 걸--- ' 하고 생각하는 부질없는 회한 같은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모든 인생문제가 모두 열쇠 소리처럼 찰카닥 하고 명쾌하게 풀어진다면 오죽 좋으랴? 나는 할 수만 있다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잘 맞는 열쇠 하나씩을 선사하고 싶다. '찰카닥'하는 진동음으로 가득 찬 세계를 상상해 보라. 잠간 동안일지라도 지구는 얼마나 즐거운 축제일이 되랴.

열쇠를 보면 떠오르는 옛날 영화가 있다. 배우들 이름은 잊었지만 <마음의 행로>라는 영화.
기억상실증에 걸린 남자 주인공이 옛날의 자기 집 열쇠를 항상 손안에 넣고 기억을 되살리려 애쓰는 모습이다.
그의 비서로 취직한 부인도 못 알아보지만 그 부인의 노력으로 그는 옛날 살던 동네 가까이 가게 되고, 옛집을 보는 순간 기억을 되찾게 된다. 항상 손에 가지고 있던 열쇠로 찰카닥 문을 열 때 그는 잃어버린 과거를 되찾는 것이다.
'폴라'하며 부인의 옛 이름을 부르는 순간, 그의 얼굴 마져 부기력한 노인에서 할기찬 젊은이의 표정으로 변하던 장면을 나는 잊을 수 없다.
하루를 지나면서, 계획한 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지고, 사람과의 만남에서 서로 어떤 이해와 따뜻한 공명을 느낀 날은 잘 맞는 열쇠로 찰카닥하고 자물통을 연 것 같이 기분 좋은 하루가 된다.
어찌 사람과의 만남뿐이랴. 우연히 뽑아든 문고판 책에서 오래 전에 끼워둔 한 장의 바랜 꽃잎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그 동안 잠겨만 있었던 마음의 문을 열고 순수했던 학생시절의 꿈을 더듬어 보기도 한다.
코를 스치는 매케한 연기 내음에서 이효석의 수필을 생각해 내고 앞서간 이들의 맑은 정서에 접해 보기도 하는 것이다.
하루가 저물고, 오후 일곱시경이 되면 나의 귀는 온통 현관문을 향해 열리게 된다.
'찰카닥'
여느 때와 같이 그이의 열쇠를 열고 들어노는 소리다.
그 날 하루가 비록 잘 안 맞는 열쇠처럼 답답하고 울적했더라도 나늬 하루는 이 렬쇠의 명랑한 울림으로 마무리지어진다.
낮고 갸날픈 소리이나 그이와 나를 이어주는 강렬한 울림이 깃든 소리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