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의 소리 / 최원현
종소리였다. 땡. 땡. 땡그렁 땡. 땡그렁 땡.
퇴근길, 도심에서 듣는 때 아닌 종소리에 사방을 둘러봤다. 반갑고 신기한 마음은 어디서 들려오는 소린가가 몹시도 궁금케 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종소리다.
가만히 들어보니 길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분명했다. 큰 교회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들려오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렇게 오랜 동안 그곳을 지나다녔지만 한 번도 종소리는 듣지 못했었지 않던가. 더구나 요즘 같은 때에 저만큼 큰 교회가 구식 종을 매달아 놓고 종을 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그러나 종소리는 분명 그 교회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교회당 문 앞에서 종탑을 올려다보았다. 종탑에 뚫려있는 사각 구멍으로 흔들리며 소리를 내고 있는 종이 보였다. 이쪽저쪽으로 힘껏 온몸을 흔들어 오가며 만들어 내고 있는 종소리에 갑자기 마음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종소리에 깨어난 듯 잊고 있었던 옛날 일들이 소롯이 고개를 든다.
어릴 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잊을 수 없는 향수의 소리가 있다. 시계가 귀했던 어린 시절, 두 종류의 소리 시계가 있었으니 기차소리와 교회당 종소리였다. 기차소리가 들리면 어디서 어디로 가는 기차구나 하고 기차 시간표를 떠올리며 시간을 가늠하곤 했다.
어른들은 논밭에서 일을 하다가도 기차소리가 들리면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몇 시가 되었구나!' 하면서 남은 시간과 일을 계산했고, 그러면서 그제야 생각난 듯 누구네가 어디를 갔고, 또 어디를 갈 것이라는 얘기들을 나누곤 했다. 기차소리는 시간과 시간, 현실과 과거와 미래를 이어 삶의 한 마당을 마련해 주곤 했었다.
그런가 하면 교회당의 종소리는 매일 새벽, 주일 낮과 밤, 그리고 수요일 밤 등 교회 예배시간에 맞춰 울리곤 했는데 그 종소리를 듣고서 나 또한 몇 시쯤인지를 알곤 했다. 그러나 둘 다 정확한 것은 아니었다. 그 무렵의 기차는 어찌 그리도 연착을 잘 했는지, 어쩌다 기차를 타러 가보면 멀리서 오는 기차는 어느 땐 서너 시간이 늦어질 때도 있었고, 한 시간 연착은 다반사였다.
교회당의 종소리도 꼭 그렇게 정확한 것이 아니었다. 어떤 때는 예배시간 보다 너무 일찍 땡그렁 거리는 가하면 어느 땐 예배 시간에 임박해서 숨넘어갈 듯 급하게 울려대기도 했다. 그러나 이 두 소리는 다 같이 그 당시 삶 속에서 새로운 변화를 향하는 소망과 생명의 소리였다. 곧 기차소리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과 희망을 늘 갖게 해 주었고, 교회당의 종소리는 매일 새벽 하루가 열리는 신호가 되었으며, 수요일과 주일 저녁에는 밤의 시작을 알려옴으로써 우리 생활에 시간의 경계를 만들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종소리를 들으면 이상하게도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것 같다. 숙연해 지고 엄숙해 지고, 어딘가 분명치는 않으나 한 번은 꼭 가야할 곳이 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소리였고, 떠나버린 사람에게는 어쩌면 그렇게도 잘 못 해준 것만 많이 생각나는지 후회로 가슴이 아리기도 했다. 종소리를 들으면 귀소본능이 발동하는가 하면 새 세상에 대한 소망으로 가슴 가득 새로운 곳에의 동경이 일어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종소리는 사람의 마음을 맑혀 주기도 하고, 잊어버렸던 옛 것들을 살아나게도 하고, 새로운 것에 대한 희망을 갖게도 해 주었다. 가공된 소리가 아닌 자연음은 투박한 것 같지만 훨씬 더 정이 넘치고 무언가 잃어버렸던 것을 다시 찾게 해 주는 것 같이 느껴졌던 것이다.
사실 오랜만에 도심 한 가운데서 듣는 종소리로 가슴이 뛰고 마음이 이만큼 정갈해 질 수 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직은 그렇게 아주 못 쓸 만큼 무뎌져 버린 감성은 아니구나 하며 그나마 스스로 위로도 받는다.
핸드벨 연주를 가끔 들으면서 아름다운 소리지만 저것 역시 가공된 음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지만 지금 듣고 있는 종소리만은 인공의 소리 속에 포함시키고 싶지 않은 것이 솔직한 내 심정이다.
어쩌면 사람들은 저마다 종소리 하나씩을 품고 사는 지도 모른다. 지난 것을 떠올리게 해 주는 종소리, 사람의 가슴속에 종소리가 하나씩 있다는 것이야말로 사람이 동물과 다르다는 가장 분명한 증표가 아닐까.
소리란 숨길 수가 없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숨기기가 어려운 것이 있는데 그것은 소리와 빛이라고 했다. 소리는 거기다 멀리까지 나아가는 특성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멀어질수록 더 은은하고 아름답게 들린다. 하지만 요즘은 소리의 홍수시대라고도 말한다. 지나친 것은 모자람보다도 못하다고 했는데 소리의 범람으로 요즘은 아름다운 소리가 아닌 공해가 되고 있다.
초등학교 때였던가. 혼자 어딘가를 다녀오는데 날이 저물어 버렸다. 가뜩이나 겁이 많았던 나였는데 점점 어두워져 가는 길을 처음엔 조금씩 빠른 걸음으로 걷다가 어느 새 뛰게 되고 나중엔 달리는 것인지 날아가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어둠을 뚫고 두려움 가득 달려가고 있었다. 온몸에선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뒤에서 무언가가 자꾸 내 발을 잡는 것만 같은데 그 때 귀에 종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어찌나 마음이 편안해 지는지 내가 놀랄 지경이었다. 그땐 교회도 다니지 않을 때인데 이 소리는 어디 교회서 들려오는 소리라는 생각이 들자 그 교회와 집까지의 길이 한 눈에 펼쳐지고, 내가 지금 가고 있는 곳이 어디쯤인가도 분명하게 깨달아졌다.
참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귀에 익은 그 소리 하나에 순식간에 불안함이 가셔 버리던 체험은 훗날의 내 삶 속에서도 아름답고 소중한 소리로 간직되어 있다. 어쩌면 그 때의 종소리는 나만 혼자라고 생각되던 두려움 속에 저만치서 '엄마다!'하고 들려오는 목소리처럼 낯익은 사람들의 목소리와 그들의 냄새와 아는 얼굴들의 다정한 모습까지 한꺼번에 나를 찾아오게 했던 그런 소리였던 것 같다.
지금 내가 듣고 있는 종소리의 교회는 세워진 지 100년이 넘은 교회이다. 3.1독립만세 사건 때도 멀리 멀리까지 종소리를 울려 보냈고, 8.15 광복 때는 기쁨으로 신이나 더욱 힘차게 울렸을 종소리, 6.25 전쟁 때는 숨죽이는 울음 대신으로 울었을 종소리, 슬픔과 아픔과 감격과 회한의 온갖 날을 다 겪으며 더러는 울고, 더러는 노래했을 종소리가 오늘은 이렇게 내 가슴을 울리고 있다.
종의 생명은 소리일 것이다. 얼마나 청아하고 맑은 소리를 멀리까지 내느냐일 것이다. 아니다. 때로는 급하고 거세거나 투박하더라도 크게만 나면 되는 경우도 있으리라. 목적은 소리가 아닌가. 그러면 사람이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사명을 갖고 태어났으련만 그것이 무엇인지 조차 모른 채 울리지 않는 종으로 목숨을 다하는 것은 아닐까.
울리지 않는 종, 안타깝고 가슴 아픈 일이다. 마치 나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설혹 울린다 하더라도 청아하고 맑게 멀리 퍼지는 소리를 원하는데 탁한 소리만 낸다거나 크고 거친 소리를 원하는데 가늘고 맑은 소리를 낸다면 그 또한 문제리라. 하지만 사람에게 저마다 목소리가 있듯, 종소리도 그렇지 않을까. 다만 종소리는 그 소리에 맞게 사람이 쓸 따름이듯 사람 또한 그렇지 않을까. 사람도 지으신 이의 뜻대로 쓰여지면 될 일이다.
오랜만에 듣게 된 종소리에 저 멀리 사라져간 어린 날이 회상되고, 또 내 본분과 사명까지 생각케 하는 보너스까지 받는다. 남은 날이 얼마이건 저 종처럼 나 또한 실한 소리를 내고 살아야 할텐데 시류에 밀려 이젠 찾아보기조차 힘들어진 옛 종처럼 나도 내 본분마저 잃어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하지만 소중하게 간직되어 현대문명 속에서도 옛 모습, 옛 소리 그대로 의연하게 울리고 있는 저 종이야말로 종다운 종, 참으로 제 몫을 다하는 종이 아닌가. 모양만 종이고 소리는 종이 내는 소리가 아닌 것도 많은 때에 추억처럼 다가와 여운을 남기는 종소리에 반 백년 살아온 삶이 한 눈에 다 보이는 것만 같다. 지는 저녁 해도 종소리를 받으며 함께 흔들리는 것만 같다. 아니 나도 지금 종을 따라 같이 춤을 춘다. 종소리에 실려 내 영혼도 안온한 한 곳으로 이르는 것만 같다. 종은 자신을 때려 남에게 필요한 소리를 들려주는데 나는 언제쯤이나 저 종처럼 내 몫의 소리를 내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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