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게 좀 쉬어가자구나 / 안재진
오랜만에 산행을 떠났다. 그 동안 말로는 소백산을 가자느니 지리산을 가자느니 혹은 치악산, 동대산, 청량산 등 수없이 주워 챙겼지만 실지로는 코앞에 닿아있는 채약산 보현산도 한번 오르지 못했다.
세상살이가 눈코 뜰 사이 없도록 바빠서 그런 것도 아닌데, 공연히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며 살다 보니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한 것뿐이다. 아니, 그보다는 게으른 탓이었다고 하는 게 옳겠다.
수도사 계곡에서 치산폭포로 오르는 팔공산 등산로는 무척 가파른 길이었다. 비탈밭 긴 이랑을 갈아 넘기는 소처럼 숨을 헐떡이며 올라가다가, 때로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장승처럼 굳어져 있는데, 등행인 k형과 l교수는 어쩜 그렇게도 활기차게 올라가는지 신기하기까지 했다.
두 사람은 느릿느릿 따라오는 나를 향해 처음 몇 번인가 빨리 가자고 재촉하더니 나중에는 아예 정상에서 만나자고 하면서 훨훨 날듯이 떠나버렸다.
그렇게 시간을 다투어 올라가야 할 사연도 없으면서 뭘 그렇게 조급하게 굴까 하는 생각도 들었으나 내가 느리게 걷다 보니 나무랄 일도 아니라서 겸연쩍게 그러마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그들을 따라가야 되겠다고 정신없이 발길을 옮겨 놓아야 하는 강박감이 없어 좋고, 또한 모처럼 나드리에 자유롭게 풍광을 음미할 수 있어 좋았다.
이를 두고 뱁새가 황새걸음을 걸으면서 가랑이가 찢어진다고 했던가.
여름이 비켜 가는 산호리는 무척 아름다웠다. 곧 올 죽음에 대비하여 옷매무새를 매만지듯 잎새마다 한층 더 윤이 흐르고, 동봉 정수리 쪽의 나무들은 이미 이승의 미련을 훌훌 털어버리려는 듯 제법 불그스름한 색깔로 하늘을 응시하고 있다. 산새들의 울음도 한층 청아하게 들리고, 계곡쪽에서 떨어지는 물소리도 연당 규방의 아낙이 하이얀 손끝으로 굴리는 옥구슬 소리 같이 긴 여운을 남긴다.
산 중턱에서 만난 사람들은 저마다 밝은 얼굴로 끄덕이며 인사를 나누고, 그들의 마음의 속 깊은 곳까지 들여다보이는 듯 가장 아름다운 순수를 느끼게 한다.
이런저런 풍경을 바라보며, 또는 느끼며, 쉬엄쉬엄 올라가다 보니 두 사람은 상당히 긴 시간을 기다렸던 모양이다.
"이젠 당신하고는 등산을 못 다니겠는데."
그들의 얼굴 표정은 웃음기를 번지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무척 짜증스러워 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왜 그렇게 조급해야 할까. 그래서 날개 달린 듯 세상살이를 껑충껑충 뛰어 넘어 달리는 것일까.
l교수만 해도 그렇다. 그는 처음에 초등학교 교편을 잡았다. 그러던 중 오랜 기간 동안 만나지 못했다고 생각하였는데, 그 사이 자랑스럽게도 대학원을 나와 어엿한 고등학교 선생이 되어 나타났다. 무척 신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흔 살이 다 된 처지에 그렇게도 열심히 노력하여 자기 인생을 한 계단 높은 곳으로 끌어 올렸다는 생각을 할 때 비록 친구사이지만 무척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그 후 또 몇 년인가 흐른 후에는 무슨 요술 방망이를 지녔는지 급기야는 박사학위를 받았고 이어서 조그만 시골 중소도시의 초급대학 교수가 되어 기세를 올렸다.
지금은 대학생활을 하면서 각종 시회 활동에 참여하는 등 폭 넓은 활동을 학 있다. 정치에도 이리저리 훈수를 들고, 고급 관리들이랑 사회 저명인사들과도 어울려 자주 술판을 벌이는 모양이다.
그가 학위논문을 돌릴 때 우리들 친구들 몇몇은 축하한다는 뜻에서 간단한 자리를 마련하였는데, 술이 한 순배 돌자 화제는 자연히 논문에 쏠렸고, 그는 느닷없이 실수를 했다. 물론 취기 탓도 있었지만 감추고 살아야 할 일은 감추고 살아야 하는 것인데, 학위 심사와 다이아 반지가 연결되는 허튼 소리를 늘어놓게 되었다.
그래서 동석했던 입심 좋은 친구는 그를 반지박사라는 곱지 않은 별명을 붙여주었고, 나중에는 그것도 모자라 요즈음은 아예 대학마담이라고 놀리고 있다. 물론 귀부인처럼 우아하다는 뜻에서 부르는 말은 아니다. 술집이나 다방에서 야릇한 애교로 손님들의 호기심을 끄는 속 버린 여인처럼 자기 중심이나 자존심이 없다는 놀림일 것이다. 그렇게 호칭하는 사람은 입심 좋은 친구뿐만 아니라 그가 가르친 학생들도 더러는 입방아를 찧는다고 들었다.
k형도 바쁘게 산 것이다. 가내공업으로 시작한 직조공장이 활기를 얻어 제법 단단한 공장으로 성장했다. 그러므로 주위 사람들로부터 성실하고 입지적인 능력가로 평가를 받기도 했는데 나주에는 이곳저곳 땅을 사 모아 이리 굴리고 저리 굴려 졸지에 수십 억 원의 재산을 가진 갑부가 되었다. 그것도 긴 세월이 아니었다. 불과 십오륙 년에 이루어진 꿈 같은 일이었다.
그렇게 변신하고 보니 마음 씀씀이와 행동도 눈에 띄게 바뀌어졌다. 전 같으면 사업장으로 들어서자마자 먼저 종업원 기숙사로 들러 바이 따듯했는가를 확인했고, 다음으로 식당으로 가 음식 정도를 확인하는 아버지 같은 사랑을 보였다고 했다. 그리고는, 자기 사무실로 들어가 업무를 챙기고 조금이라도 시간 여유가 생기면 작업복을 입고 일을 함께 하는 존경받는 사장이었다.
그런데 사업이 확대되고 재산이 부쩍부쩍 늘어나고부터는 회사에 있는 시간보다는 바깥에 있는 시간이 더 많다는 것이다. 즐겨 입던 작업복도 버린 지 오래 되었고 경영도 전문인을 사장으로 채용하여 대행시키고 그는 당당한 회장으로 둔갑하였다.
하루 종일 한다는 일은 골프채를 잡고 돌아다니는 것이고, 그리고 별난 사람들과 어울리는 약속을 하고, 또는 뻔질나게 국회의원의 외유 기간에 맞춰 먼발치로 따라가서는 현지에서 함께 어울려 돈이나 쓰고 돌아오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그렇게 바쁘게 사는 사람들이라서 그런지 산길을 걷는 것도 여유가 없는 모양이었다. 연구실을 비워두고, 시간을 억지로 조정하면서까지 외도를 해야 하고, 회사가 노사분규로 몸살을 앓고 있으면서도 힘있는 사람들과 골프 약속을 지켜야 할 정도로 정신없이 살자니 산행인들 오죽하겠는가.
나는 물어 보았다. 그렇게 바쁜 마음으로 뭐 하러 산행을 나섰느냐고 말이다.
그랬더니 대답이 가관이었다. 산에 가자고 한 사람이 당신이 아니냐고, 그런 걸음으로는 운동도 건강도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힐책조였다.
아마 그들은 산책이나 등산을 무슨 경쟁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빠른 시간에 많은 운동을 하고 다시 허겁지겁 내려가 다른 일을 하겠다는 뜻 같았다.
그렇듯 바쁘게 살았기에 초등학교 선생이 대학교수가 되었고, 자기집 창고에 베틀 몇 대를 놓고 똑딱거리던 사람이 일약 갑부가 되었을까. 앞뒤 쳐다보지 않고 성급하게 살다 보면 부작용도 적지 않을 텐데 개운찮은 기분으로 나 혼다 중얼 거려 본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들은 너무 바쁜 국민이다. 어쩌다 다른 나라를 돌다보면 너무 성급하다는 소리를 자주 듣게 된다. 특히 동남아시아제국의 식당에서는 한국 관광객만 들어서면 종업원들은 어김없이 '빨리 빨리' 를 되뇌일 때는 마치 조롱 같은 느낌이 들어 얼굴이 뜨거워질 때가 있다. 독일에서도 같은 소리를 들었다. 한국인을 안내하는 관광사 직원이 우리 백성들은 어떻게나 급한지 일을 하면서도 두렵다는 자탄 같은 말을 했다.
이런 저런 일을 떠올리며, 나는 어리석은 말인 줄 알면서도 또 한번 친구를 향해 등산도 그렇지만 세상살이도 쉬업쉬엄 쉬어가면서 살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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