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알머리 / 유창희
민둥산 부위에 약을 바르고 계속 마사지를 하라고한다.
일회용 비닐장갑을 끼면 편리하겠지만 아무래도 촉감이나 정성이 부족할 것만 같다. 마사지보다 힘주어 문때는 수준. 이러다 엉뚱한 내 손가락에 털이 날것만 같다.
어느 날은 화기애애한 희망의 몸짓으로 약 이름을 적어주며 사오란다. 수년 동안 그 약을 사러 시내 대형약국에 다녔다. 그날따라 중년의 남자 약사가 은근한 눈길을 보내며 나를 좀 보잔다. 사흘에 피죽 한 그릇도 못 얻어먹은 몰골에 비쩍 마른 몸매로 눈망울만 쾡 했던 나. 들으나마나 뻔하지. 또 쓸데없이 영양제를 권하려나 보다 여기고, 그 약만 사면 된다고 제법 단호하게 말했다. 안타까운 듯 그 약을 왜 사느냐고 묻는다.
"용도는 알고 계시지요?"
"예"
그는 느끼한 눈빛으로 효과가 있더냐고 묻는다. 글쎄... 아직 잘 모르겠다는 말에, 아주머니를 위해 하는 말이라며 견딜만하면 약을 끊어보라고 넌지시 권한다. 그때까지 발모제인줄만 알고 복용했던 그 약이 호르몬제로 남성의 기능을 차츰 죽이는 효과가 있으며, 그로 인한 부작용으로 특정부위에 털이 날 가능성이 있다니, 우리 부부는 잘못된 정보로 합의하에 차폭할 뻔했다.
남편은 가끔 아파트 베란다에 서서 나를 급하게 부른다. 1층 현관을 빠져나가는 사람을 내려다보며,
"저놈보다 내가 낫지?"
머리가 벗겨졌다는 이유 하나로 점잖은 이웃 주민이 '놈'으로 변한다. 나는 정직하고 바른 입을 가졌다. 맹세코 늘 바른 말만 하기를 원하지만,
"그럼~. 저 사람은 완전 대머리네"
매번 힘주어 말하는 아내가 의심스러웠는지 어느 날 느닷없이 비디오 기계를 들이대고 아이들보고 이쪽으로 저쪽으로, 그래그래 더 뒤로 하면서 찍는 것이 아닌가. 그때 그자리에 차라리 내가 없었더라면 수고로움을 덜 수 있었을까.
거짓을 말한 대가로 한동안 부엌에 쳐 박혀 검은콩 검은깨 검은쌀 김 미역 다시마 등등 시커먼 색은 다 동원해 보았다. 풍문에는 먼지처럼 피어오르다 진짜 털이 난다던데, 푸른곰팡이처럼 피어오르는 습한 기운은 다 어디로 날아갔는지.
약이나 음식으로 안통하니 혹, 학술적으로 나가려는지, 급기야 남편은 집에서 가까운 대학으로 침술을 배우러간다. 드디어 가문에 돌팔이가 나올 요량인가보다.
어릴 때, 까만 밤 불빛에 현혹되어 손으로 개똥벌레를 잡았던 기억은 있으나, 어찌 우아한 숙녀의 하얀 손가락으로 꼬물거리는 벌(蜂)의 감촉을 즐길까. 남편은 준엄한 목소리로 지시한다. 정확한 고지를 찾아 정수리 부분에 꽂으란다. 아차, 잘못하면 정수리를 쏘기 전, 내 손가락에 먼저 벌침이 꽂힐 위급한 상황이다. 손끝이 오그라들고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대충 꽂았다고 허위로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일단 침놓은 부위가 부어오르고 머리가 흔들려 지끈거리며, 부기가 이마를 타고 내려와 눈두덩까지 벌겋게 부어올라야 효과가 있다니, 나의 침술행위는 참으로 멀고도 험하다. 오랜 수련끝에 그즈음 남편의 날렵한 코뼈는 부기 속에 파묻혀 두리뭉실 장떡처럼 되었다.
오늘, 누구는 민트향의 치약으로 머리감는 방법을 쓴다는데 효과가 있었으면 좋겠다. 사람 사는 일이 어디 마음먹은 대로 된다든가. 그러다 혹 머리에서 생둥맞게 새하얀 이가 솟아나오는 것은 아닌지.
남편의 친구들은 나를 탓한다. 대강 좋아하라고. 밤마다 남편의 머리카락을 너무 잡아당겨 속알머리 없는 남자로 만들었다나 어쨌다나.
조선시대 이덕무는 선비의 예절을 기록한 책(士小節)에서 '세상 풍속은 앞이마의 머리털이 일찍 벗겨지는 것을 입신출세할 상이라고 하여, 그 머리가 대머리가 안 되는 것을 민망하게 여겨, 상투를 틀고 망건을 쓰는데 심하게 졸라매 그 머리가 일찍 벗어지기를 바라고, 심지어는 족집게로 머리털을 뽑고...'라는 글을 썼다.
예나 지금이나 그 기준으로 따진다면 내 남편의 모습은 안정감이 있는 뱃살과 더불어 점잖게 벗겨진 머리는 품격을 갖춘 이 시대의 성공한 남자의 모습이다.
흰 고양이든 검은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경제논리를 말하던 덩샤오핑의 궤변. 흰머리든 검은 머리든, 주변머리든 속알머리든, 아내인 내가 괜찮다는데 누굴 위한 처절한 노력인지.
소갈머리라곤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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