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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1

[좋은수필]빈집에 뜬 달 / 도창회

빈집에 뜬 달 / 도창회


  
 
오지 마을 빈집이 산짐승처럼 흉물스런 얼굴로 서있다. 한때는 사람이 기거하던 처소였건만 어찌 저리 버려졌는가. 폐허를 절감하는 순간이다. 
 

빈집 마당은 온갖 잡풀들이 우거져 키를 재고, 대청마루는 흙먼지가 덕지덕지 쌓여 있다. 창호의 돌쩌귀가 빠져 바람에 덜컹댄다. 방안을 들여다보니 그야말로 난장판 그대로다. 온기 잃은 고가구들이 허섭스레기와 함께 나뒹굴고 또한 부엌간의 살벌한 꼴이란 그 기막힘이 눈살을 찌푸리기에 족하다. 부엌 아궁이가 꺼멍 아가리를 쩌억 벌리고 버럭 고함을 내지른다. 여기저기 내 시력이 닿는 곳마다 허탈한 마음이 내장 속을 훑는다. 이 집은 어떤 사람이 살았을까? 몹시 궁금타.

 

여긴 전북 장수 계남 백화산(白華山) 구릉지, 오도카니 앉아 있는 어느 두메 마을. 이 오지 동리만 해도 이렇게 버린 빈집이 여남은 더 된다. 이농 현상(離農現像)으로 농사일을 기피해 도회지로 떠나 버렸다는 소문이다. 쓰던 가구를 고스란히 두고 떠난 뒤 10년 20년이 되어도 단 한 번을 안 찾아오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처음 이 동리에 와서 집이 비어 있다는 데 호기심이 발동하여 집 가를 맴돌며 기웃거리다가 점점 뻔치가 늘고, 숫기가 내둘러 이젠 한낱 취미처럼 빈집을 들락거리게 되었다. 우선 주인이 없고 보니 가로막는 사람이 없어 좋고, 설령 야밤에 내가 들랑거리는 것을 누가 보았다 해고 도둑으로 모는 일이 없으니 나들이가 편안하다.  

조용한 두메 마을, 태고의 정적 속에 고즈넉이 달빛에 젖어 있는 빈집으로 나들이를 가는 것은 내게 있어서는 별난 취미가 아닐 수 없다. 마을 초입에서부터 산림 발치 빈 기와집까지 띄엄띄엄 놓인 빈집들을 가가호호 찾아다니다 보면 온 밤을 지샐 때가 많다.

 쥐 죽은 듯 사방이 고요한 이 한밤, 교교한 달빛을 머리에 이고 마당에 뒤얽힌 덤불을 헤치고 들어가 먼지 쌓인 마루에 엉덩이를 슬며시 붙이고 서천(西天)에 흐르는 달을 멀거니 쳐다보노라면 밤 가는 줄을 모른다. 실로 신비로운 달밤이다. 방안에 고가구들이 너저분히 널려 있길래 더 신비롭게 보일는지 모른다.

 돌연 방안에서 부스럭대는 소리가 나지만 나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 도깨비라도 나올 양이면 내 쪽에서 먼저 벗을 삼자고 말하면 될 일이다. 가끔 반기는 사람이 없는 것보다는 뭣이 되었든 있는 게 좋게 생각될 때도 있다. 밤새 이 집 저 집 쏘다니다 만난 도깨비들을 새끼줄로 엮어 몰고 다니다 희붐한 새벽녘에 동리 입구에 있는 내 집 앞에 다다라 해산시키면 될 일이다. 이 천연한 나의 행동에 도깨비들도 하품을 하리라. 허나 그런 일은 있지도, 있을 수도 없지만 다만 정적이 만들어 낸 내 상상이 그렇다는 것뿐이다.  

늦은 밤 책상머리 내가 글을 쓰고 있을 적 둥근 달이 투명 창을 들여다보며 나를 밖으로 불러낸다. 나는 마치 귀신에게 씐 사람처럼 황망히 빈집으로 달려간다. 그와 밀애하는 곳이 인적 없는 빈집이기 때문이다. 여왕달을 맞는 가슴은 쿵닥쿵닥 디딜방아를 찧는다. 호젓한 이 밤 따로 챙길 바람(願)은 없어도 거기는 정밀(靜謐)의 안분(安分)이 있고, 따로 반기는 이는 없어도 그리움으로 풀죽어 파리해진 여신의 얼굴이 있다. 여신은 어느새 내 가슴팍에 뛰어들어 얼굴을 파묻고 울고 있다. 나도 미쁜 마음에 그녀를 꼬옥 껴안은 채 함께 울먹이고 있다. 두 몸은 어느덧 달구어져 화덕이 된다. 화려한 오르가슴의 클라이맥스를 넘기는 신비의 순간일러라.  

오늘밤은 이 집, 내일 밤은 저 집, 집집마다 번갈아 방문하다 보니 이젠 모두 내 집인 듯 마음이 편안하다. 아니 오히려 집들이 나로 인하여 빈집을 모면케 되어 좋을지 모르겠다. 도깨비의 출몰만 해도 그렇다. 내가 늦은 밤 빈 집을 찾지 않으면 도깨비의 존재가 뭐란 말인가. 다행히 어릴 적부터 무서움 없는 머슴애로 자란 까닭에 빈집을 가는 일이 수월하고 또 도깨비의 발악이란 것도 있는 게 아니겠는가. 그러나 도깨비야 있든 말든 그들의 발악쯤은 도무지 문제가 되질 않는다.  

몰취미든 악취미든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은 대낮에 가면 아무런 재미가 없다. 부엉이가 지절대는 이슥한 밤에 몰래 찾아가야 제맛이 난다. 어슴푸레 달빛이 비치는 방안에 한가로이 너즈러져 있는 물건들이 한결 도탑게 신비감을 자아낸다. 금방 산발한 악귀라도 튀어나올 법한 찰나, 소름이 오싹 돋아나는 밀폐된 정적 속에서 올려다본 푸른 달빛은 더욱 기괴천만(奇怪千萬)하다.
때론 무섬증을 억제하느라 애를 쓰다 이제는 도저히 못 참겠다 싶어 돌아 나올 바로 그 무렵, 등골에 찬 기운이 돌아 식은땀이 번져 나오는 순간 악귀의 붉은 손톱이 내 목덜미를 덥석 잡는 듯 솜털이 일제히 거꾸로 일어서는 찰나, 바로 그 순간에 무심코 올려다본 일그러진 달의 얼굴은 신비의 극치(極致)라고 할까. 적이 나를 놀리는 듯 달의 그 방약무인한 표정을 살피는 순간은 나를 빈집에 빠지게 하는 관상(觀賞) 삼매경(三昧境)이라고 해두고 싶다.  

깊은 밤 따듬따듬 허물어진 돌담을 넘어 빈집 마당을 들어서는 나의 발걸음은 마냥 조심스럽다. 가벼운 걸음걸이로 댓돌 위에 사뿐히 올라선다. 사방이 쥐 죽은 듯 고요한 분위기 속, 내가 내쉬는 숨소리조차 부담스러운 그 찰나에 처마 끝에 흐르는 달은 나를 먼저 보고서 배시시 웃고 있다. 자꾸만 낮에 본 방안 살풍경한 꼴이 상기되어 뒷골이 당기지만 나는 헛기침 몇 번으로 곧 마음을 평정한다. 헛기침에 놀란 작은 짐승 한 마리가 소스라쳐 풀 속으로 냅다 달음박질 친다. 이럴 때는 이 빈집에 나 혼자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뭔가 떨떠름한 기분이다. 집, 달, 그리고 나. 이 셋으로 교감되는 신비가 잠시나마 깨어지는, 조금은 불유쾌한 기분이다. 그런 기분은 오래가지 않고 곧바로 회복되기는 하지만서도. 음침한 처소의 한갓진 장소에서 달과 단 둘 사이 오가는 교감, 이것은 나만이 얻어 갖는 지복인 양하여 가슴 기슭 한 녘이 땃땃해진다.  

내가 빈집에다 달을 혼자 맡겨 놓고 떠나며 섭섭히 뒤돌아보는 순간은, 마치 인간의 작위(作爲)가 만들어 놓고 스스로 허물어 버리는 어떤 신비 앞에 잠시 혼돈으로 엉거주춤 서성이고 있는 형국이라고 할까. 꿈이면 어떠랴, 꿈일지라도 깨지 말았으면.  

아슴푸레한 오지의 산 자락 중허리께 걸린 초생달이 실눈을 뜨고 내려다보는 밤이면 나는 살금살금 발자국의 그림자를 지우며 빈집을 향해 밀행을 떠난다. 흡사 밤손님이 몰래 하는 짓만큼이나 소름이 돋는다. 오늘밤도 여신의 베일을 벗기려 나는 흥분된 가슴을 문지르며 밤나들이 나갈 차비를 서두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