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의 붓꽃 / 손광성
시집가기 싫다고 누나가 말했다.
시집은 가야한다고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그 사람이 싫다고 조그만 소리로 누나가 말했다.
그 사람이어야 한다고 큰 소리로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먹기 싫은 밥은 먹어도 살기 싫은 사람하고는 못 사는 법이라고 말한 것은 어머니였다.
나는 속으로 박수를 쳤다. 그날 어머니는 평소의 어머니보다 훨씬 커 보였고, 그래서 그날은 어머니가 이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보다 더 큰 소리로 아버지가 고함을 질렀다. 그건 목소리가 아니라 무슨 천둥소리 같았다.
그 위세에 눌려 어머니는 다시 평소처럼 조그만 헝겊 인형으로 줄어들고 말았다. 열일곱 살 누나는 가망 없는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누나를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열 살자리 나는 너무 작았고 아버지는 너무나 컸다. 사람이 작으면 힘이 없다는 것과, 힘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한다는 것과,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은 얼마나 오래오래 가슴이 아파야 하는가를 나는 너무 일찍 그 때 알아 버리고 말았다.
함(函)이 들어오던 날 밤 누나는 이불을 쓰고 누워 버렸다. 누나의 울음은 깊은 밤 강물이었다. 누나의 강물은 내 가슴속으로 이어져서 흘렀다.
의사가 몇 차례인가 다녀갔다. 그래도 누나의 병은 났지 않았다. 의사는 누나가 왜 아픈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저러다 이제 누나가 죽을 것이라는 것도 나는 알고 있었다.
어느 날 밤 이상한 소리에 잠이 깼다. 어머니는 누나를 안고 우시면서 들릴까 말까 한 소리로 말씀하셨다. 정년 어미를 두고 죽을 작정이냐고… .
나는 도로 눈을 감고 자는 체했다. 갑자기 목이 아팠고, 그리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낮이었다면 나는 눈물을 몰래 닦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둠 때문에 그러지 않아도 되었다.
분명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누나는 며칠이 지나서 병석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 예쁘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내가 아무리 웃겨도 누나는 웃지 않았다. 표정 없는 얼굴처럼 슬픈 것은 다시 없다는 사실을 그 때 너무 일찍 알아버리고 말았다.
그런 누나가 어느 날부터인가 수를 놓기 시작했다. 수틀에는 청보라색 붓꽃 한 송이가 조금씩 피기 시작했다. 하얀 비단 위에 꽃이 먼저 피더니 다음에는 줄기가 나오고 그리고 잎이 돋았다. 개울가에서 피는 붓꽃은 잎이 먼저 나고 다음에 줄기가 자라고 그 다음에 꽃이 피는데, 누나의 것은 거꾸로 피었다. 묻고 싶었지만 누나 앞에서는 입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나마 꽃이 다 피었는가 싶으면 누나는 그것을 뜯어냈다. 잎을 뜯어내고 그 다음에 줄기를 뜯고 그리고 꽃을 뜯어내었다. 실밥 하나 없이 뜯어낸 다음 처음부터 다시 수를 놓기 시작했다. 이제 다 놓았는가 싶으면 또 뜯어내는 것이었다. 무슨 생각으로 그러했는지 나는 알 길이 없었다. 슬픔을 잊으려고 그리하였을까? 아니면 세상 모든 것을 다 뜯어 버리고 다시 시작하고 싶었을까?
시집가던 날 비가 오지 않았다. 누나도 울지 않았다. 웃지도 않았다. 사람들이 말했다. 여자란 시집갈 때는 다 그리하는 법이라고. 한두 해만 지나면 아들딸 낳고 잘살 것이라고.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누나는 아이를 낳지 않을 것이고, 웃지도 않을 것이고, 그리고 오래오래 앓을 것이라는 것을.
며칠이 지난 후 누나가 보고 싶어서 몰래 누나네 집에 갔다. 수를 놓고 있던 누나가 뭇곷처럼 수척한 얼굴로 나를 보고 웃었다. 나는 오래는 마주볼 수 없고, 얼굴을 떨구고 수틀 속의 붓꽃을 보는 체했다. 그리고 세상에는 눈물보다 더 슬픈 웃음도 있다는 것을 또 그 때 너무 일찍 알아 버리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다짐했다. 내가 자라서 어른이 되고, 어른이 되어서 힘이 세어지면, 누나를 도로 찾아올 것이라고. 꼭 도로 찾아올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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