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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1

[좋은수필]보리밭 / 이운우

보리밭 / 이운우

 



동생은 무서워서 못 가겠다고 버텼으나 등을 떠미는 언니의 성화 때문에 길을 나섰다.

언니가 ‘읍내에 가서 영화구경 시켜준다’는 꼬드김에 심부름을 나서긴 했지만 밤길이라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마른침을 삼키며 아까 준비했던 말을 다시 한 번 속으로 중얼거리며 연습을 해 보았다.

“저어, 저는 언니가 아닌데요, 언니가 갑자기 급한 일이 있어서 지가 대신 나왔어예, 혹시나 밤 새도록 기다릴까 싶어서...”

언제 따라왔는지 복실이도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앞서 가고 있으니 생각보다 무섬증은 좀 덜했다. 동생은 혹시나 남의 눈에 띠일까 큰길을 놔두고 사람들의 왕래가 드문 송화가루 날리는 솔밭 언덕으로 해서 샛길을 이용하여 잰 발걸음으로 동구 밖으로 나갔다.

폐허가 된 물레방아 정미소 터가 있던 곳으로 가면서 생각을 해봤다. ‘참, 언니도 이상하지, 아까 저녁 먹을 때까지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배가 살살 아프다면서 심부름을 좀 가 달라고 하니, 심부름시킬 게 따로 있지..., 설마 뭐, 별 일이야 있겠나?, 우리 집에도 몇 차례 다녀갔고, 안면도 있는 사람인데... 그나저나 조놈의 쑥꾹새가 ...'

달빛과 실안개 젖은 4월의 밤길은 온통 보리밭 천지였다. 바람결에 일렁이는 청보리가 익어 가며서 풋내음을 풍기고 있다.

이제 달빛에 하얗게 피어있는 무 꽃밭을 지났다. 군데군데 한 움큼씩 핀 노란 유채꽃의 알싸한 내음이 코끝을 스치자 머리가 아찔했다.

알 수 야릇한 기분이 두근거리는 가슴을 더 크게 부풀게 했다.

정미소에 가까워지자 앞서 가던 삽살개가 더 이상 가지 않고 주저앉아 낑낑거렸다. 저쪽 앞에 물푸레나무에 기대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서있는 사람이 달빛에 어슴프레 보였다. 몇 발자국 앞으로 걸어 나가 뛰는가슴을 진정시키고는 떨리는 소리로,

“저, 아저씨! 저는요”하는데 강 건너 나루 에서 이쪽 섶다리 위를 터벅터벅 건너오는 사람이 있었다. 갑자기 삽살이가 꼬리를 흔들며 강 가로 달려가면서 요란하게 짖기 시작했다. “오냐, 그래그래, 우리 복실이가 여기까지 마중 나왔구나 . 어 기분좋다.” 

수리조합장인 박씨 영감이 언양 장에 갔다 오는 길이었다. 술에 취해 늦게 귀가하면서 삽살개를 보자 반가운 김에 이리 비틀 저리 비틀 갈 지 자 걸음에 걸쭉한 목소리로 육자배기 한 소절 뽑아 드는 중이었다. ‘아차 큰 일 이다’. 간이 콩 알 만하게 오그라 들었다. 어디 숨기는 숨어야 되는데 길목이라 숨을 장소가 없다.

자신도 모르게 머뭇거리는 사내의 손을 잡아끌고 급한 대로 근처 보리밭으로 들어갔다. 쪼그려 앉았지만 덜 자란 보리의 키 때문에 등과 목이 훤히 들어 났다. 들키면 안 되는데 ‘에라 모르겠다. 드러눕자’. 숨을 죽이고 누워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강을 다 건너 온 조합장 영감은 정미소 옛 담벼락 터에 서서 한참 동안 볼일을 보고는 코를 휑풀고 담에 걸터앉아 담배까지 피어 물고는 일어 설 줄 몰랐다. 이윽고는 “복실아! 어서 가자, 니가 앞장 서라, 어 취한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희망가 한 곡조 읊으면서 삽살이 놈을 가자고 재촉했다.

그런데 이제는 이놈의 개가 보리밭 주위를 삥삥 돌며서 집에 갈 생각을 않고 말썽을 부렸다. 숨어서 지켜보는 사람 애간장 다 마르게 만들었다. 한참이나 실갱이를 하다 막대기를 들고 개를 쫓는 모양이다. 그때서야 집 쪽으로 사라졌다.

밭고랑 사이에서 나는 보리 익는 냄새와 훈훈한 땅냄새, 그리고 아련한 분내음이 사내의 이성을 잃게 했다.

푹신푹신하고 아득한 곳에 누워 있으니 누가 먼저 모르게 두 입술이 포개졌다. 입술이 포개지니 손이 가만히 있을 수 있나. 자연스럽게 뭉클한 젖가슴 쪽으로 내려갔다. 가슴은 어쩔 수 없었지만 몸빼바지 만큼은 두 손으로 꽉 잡고 있었다. 거대한 힘의 의해 고무줄이 투두둑 터졌다. 달빛에 드러나는 눈부신 햐얀 속살은 무 꽃보다 더 희고 보드라웠다. 자꾸만 서러운 눈물이 두 뺨으로 흘러 내렸다. 달빛이 사라지고 가슴속으로 거대한 별이 쏟아졌다. 멀리서 삽살개가 주인을 기다리는 듯 컹-컹 짖어댔다.


조합장 영감은 평소에 면사무소에 근무하는 젊은 이주사를. 눈여겨보아 왔다. 한 일 년 동안 심부름도 시켜보고 집에 데리고 와서 큰 딸애더러 술상과 밥상을 차려오게 하여 같이 먹어보았다.

행실이나 가문의 내력도 몰래 뒤를 타 보고는 맏사위 감으로 점을 꽉 찍어 놓았다. 그리고 면장에게 ‘그 총각이 어떻냐’고 넌지시 물어보니 입에 침이 마르는 칭찬에다 사무실 내에서도 눈독을 들이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특히 같은 직장 내 모 아가씨와 사이가 좋다는 소문이 있으니 빨리 손쓰지 않으면 빼앗긴다는 소리를 듣고 ‘아이고, 사위감 빼앗길라, 담판을 지어야지’ 싶어 점심시간에 총각을 불러내어 불고기 백반에 소주를 한잔 했다. 그리고 체면 불구하고 “알다시피 우리 큰 딸년이 시집갈 때가 되었는데, 김 주사 생각이 어떻소?, 그만 하면 별로 빠진데 없으니께, 어디 잘 생각 한번 해 보소” 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니 싫다 좋다 내색 없이 얼굴만 붉어지며 빙그레 웃는 것을 보고 부끄러워서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총각은 내심으로, ‘둘째 딸이 내게 관심이 많튼데요... 저는 둘째 아가씨에게 더 마음에 있슴니다’ 라는 소리를 할까말까 하다가 입안에 맴돌았다.

“싫다는 소리 없으니 승낙한 걸로 알고, 집에 놀러 자주 오고, 데이트도 한번 해 보소” 언질을 주고 집으로 왔다. 여편네더러 큰애에게 그 사실을 이야기 해주고 둘이 한번 만나보고 의향이 어떤지 확답을 받아 내라고 했다. 그 소리를 들은 큰 딸애는 지 엄마에게 며칠 간 말미를 달라고 한 날이 바로 오늘이다.

이 날 낮에 큰딸은 총각에게 저녁에 할 말이 좀 있으니 만나자고 약속을 해놓고서는 저녁에 동생을 대신 내보냈던 것이다. 그리고 엄마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 놨다. 처음부터 그 총각은 마음에 없었다고. 남몰래 장래를 언약한 사람이 있는데, 같은 동네 사람이라 소문이 날까봐 둘만이 아는 비밀로 하고, 지금은 군대에 가 있어 내년이면 제대하는데 그 사람과 결혼을 하겠다고 고백을 했다. 그리고 덧붙여서 ‘자기보다는 동생이 그 총각과 더 잘 어울린다’는 의견을 조심스레 말했다.

그 날 이후 동생의 뱃속에서 보리가 커 가는지 자꾸만 배가 부풀어 가는 바람에 해가 가기 전 12월에 동네 창피 무릅쓰고 동생이 먼저 혼례를 올렸다.

그런데 세월이 가도 박씨 영감은 가끔씩 가다 둘째 사위를 첫째 사위로, 첫째 사위를 둘째 사위로 헷갈리게 불러 온 집안을 웃음바다로 만드는 일이 종종 있는데 본인 말로는,

“아니여,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상하다고..., 분명히 큰 딸년과 맺어 줄라고 했는데, 작은 애가 먼저 꿰차고 결혼을 했으니, 큰사위가 작은 사위로 변하고..., 참, 사람팔자 알 수 없네, 인연은 따로 있다더니......”라고 한다.

그 때 보리밭에서 만든 딸년이 올해 대학에 들어갔다. 그림과 조각에 소질이 있어 서울에 있는 미대에 갔는데 누구의 끼를 이어 받았는지 몰라도 노래까정 잘 부르는 모양이다. 인기가 좋아 보컬 그룹인가 뭔가에 가입한다더니, 어느새 리더싱어가 되어 축제라는 축제는 다 돌아 다닌다고 했다. 거기에다 가을에 가요제에 나갈 준비로 바쁘다면서 몇 개월 째 통 집에 내려올 생각도 없다다. 그새 딸의 얼굴을 잊어 먹은 것 같아 전화를 걸면

" 용돈 좀 부쳐 줘” 가 유일한 대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