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를 후비며 / 정진권
어느 날 갑자기 귀가 몹시 가렵기로 나는 막내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손가락 끝이 그 가려운 데까지 닿지 않아 퍽 안타까웠다. 그때 나는 내 막내손가락의 무능을 탓했다.
그러다가 문득 보니 성냥개비 한 개가 책상 위에 흘러 있었다. 나는 얼른 그것을 집어 귀를 후볐는데 그 시원함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과연 너로구나"
나는 이렇게 감탄을 발하며 한참 시원삼매에 침잠했었다. 아, 그러나 누가 뜻했으랴. 그만 그 귀중한 성냥개비가 자끈동 부러지지 않는가.
나는 그 부러진 성냥개비를 창밖으로 짜증스럽게 내던지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라고 욕을 퍼부었다.
결국 나는 귀후비개를 찾기로 하고 서랍을 뒤졌다. 마침 찾을 수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상쾌한 한때를 즐기면서 귀후비개의 공로를 찬양했다.
그러다가 나는 문득 내 막내 손가락을 생각했다. 가려운 데까지 닿지 않는다고 타박 받은 손가락이다. 그리고 성냥개비를 생각했다. 한참 시원할 때 요절해서 아무짝에도 몹쓸 것이라고 욕을 먹은 성냥개비다.
나는 좀 반성하기로 하고 우선 내가 그들을 타박하고 욕한 것은 정당했나 스스로 물어 보았다. 언뜻 정당한 것 같았지만, 나는 참 쉬운 점 한 가지를 잊고 있었다. 그것은 다른 게 아니라, 손가락이나 성냥개비는 결코 귀를 후비기 위해서 만들어진 게 아니란 사실이었다.
나는 막내 손가락의 본래의 임무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최소한 이것이 없으면 성냥개비와 귀후비개를 태산만큼 가졌다 할지라도 나의 손가락 불구자임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성냥개비의 임무는 불을 켜는 데 있다. 그러니까 성냥개비가 그 자신의 실수나 못남으로 하여 불을 일으키지 못할 때에만 나는 성냥개비를 욕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니 좀 미안스러웠다. 해서 나는 막내 손가락을 어루만지고, 창밖에 내던진 성냥개비를 주워다가 성냥갑을 찾아 그 안에 잘 넣어두었다. 반쪽 남은 몸으로나마 한스러움 없이 그 본래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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