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꽃 필 때 들리는 소리 / 구활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는 것의 위에 있다’는 말은 맞는 말인가. 불가에서 흔히 말하는 이 말은 참말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선문답이나 화두 같기도 한 ‘보임’과 ‘안보임’의 문제는 오랜 수행을 거치지 않으면 결론에 이르지 못한다고 한다. 현상을 중시 한다면 보이는 것이 우선이지만 정신을 소중히 생각한다면 보이지 않는 것이 세상을 지배한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러면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은 어느 것이 우위에 있을까. 사람의 몸이 일천 냥이라면 눈이 팔백 냥쯤 된다고 한다. 보이는 것이 단연 으뜸일 수 있다. 그렇다고 눈이 소리를 감지하는 귀를 깔보면 안 된다. 태초에도 소리가 빛을 불러와 낮과 밤을 구분했다고 창세기 서두에 소상하게 씌어져 있다. 눈은 안과라는 단과반의 단일 품목이지만 귀는 이비인후과란 복합반의 선두주자다.
능엄경을 보면 눈은 팔백 가지 공덕을 갖고 있지만 귀는 일천이백 가지 공덕을 지니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등 뒤에서 들리는 소리를 귀는 제자리에서 알아차릴 수 있지만 눈은 돌아보아야 겨우 볼 수 있다. ‘듣도 보도 못했다’는 말의 순서를 보면 누가 형인지 동생인지를 금방 알 수 있다.
소리를 듣는 귀는 역시 귀물(貴物)이다. 귀는 이비인후과의 반장답게 코가 담당하고 있는 냄새까지 자신이 관장할 때도 있다. 정좌난문향(靜坐蘭聞香). ‘조용히 앉아 난초 향기를 듣는다.’는 옛 선비의 말씀은 귀가 누리고 있는 지고지순의 경지를 쉽게 설명한 것이다. 어떻게 무슨 보청기를 달았길래 향기를 귀로 듣는단 말인가.
오감을 대표할 만한 귀의 신경조직은 우리 몸 전체에 퍼져 있는 것은 혹시 아닐까. 그러니까 몸이 바로 귀라고 말하면 틀린 표현일까. 아니야. 영 틀린 말은 아닐거야. 노르웨이의 표현주의 작가 에드바르드 뭉크가 그린 걸작 ‘절규’란 작품을 난초 향을 듣는 마음가짐으로 보고 있으면 온몸에 소름이 돋으면서 정말 공포의 절규가 하늘을 뚫고 날아와 심장에 박히는 것 같다. 이 때 들리는 절규는 귀가 아닌 온몸을 통해 들린다.
몸을 통해 전달되는 소리는 반드시 전율을 일으킨다. 몸이 알아채는 전율은 바로 오르가즘이다. 아름다움의 극치다. 귀가 듣는 음은 소리의 단위인 데시빌로 측정할 수 있고 눈이 감지하는 빛은 밝음의 단위인 칸데라로 기록할 수 있다. 그러나 몸이 듣는 소리는 높은 음 자리거나 낮은 음 자리거나 아무 상관이 없다. 전율이 일 때 돋는 소름의 단위로 측정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귀는 아름다운 소리만 듣기 좋아하는 편청주의자는 아니다. 뭉크의 그림 ‘절규’를 보고 있으면 귀를 틀어막아야 할 정도의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만 그 속에는 원초적인 갈구와 애원이 배어있다. 그 그림을 보고나면 산정에서 마음껏 고함을 지른 것처럼 시원하고 후련하다. 그런 은혜로운 감동의 터널을 빠져나오는 데는 적어도 한 며칠은 걸려야 한다.
나는 여태까지 소리 중에서도 그리움을 대표하는 예리성(曳履聲ㆍ신발 끄는 소리)이나 애내성(欸乃聲ㆍ노 젖는 뱃소리)같은 지극히 감성적인 것들만 좋아하고 사랑해 왔다. 바닷가 암자의 구석방에서 듣는 해조음은 얼마나 아름다우며 떡갈나무 낙엽 위에 ‘후두둑’하고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는 또 어떤가. 어디 그 뿐인가. 낚시 바늘에 매달려 앙탈을 부리는 붕어의 물장구 소리는 어떻고, 술독에서 ‘뽀그륵’하며 자지러지는 술 익는 소리는 비발디의 사계를 한 소절로 줄여 놓은 소리 보다 훨씬 아름답다.
클래식을 전공하는 음악가들도 더러는 루이 암스트롱의 ‘홧 아 원더풀 월드’와 같은 쉰 목소리의 재즈와 헤비메탈 음악을 듣는다고 한다. 그러니 아름다운 낮은 음 자리의 소리만을 찾아다닌 내게 뭉크의 ‘절규’는 새로운 각성이었다. 화집을 뒤적이다 뭉크의 ‘절규’를 만날 때는 오장육부가 확 뒤집어지면서 귀 눈 코 등 구멍 마다 소리가 튀어나올 것 같은 낯선 소리의 향연은 참으로 흥미롭다. 내 의식 속에 차려져 있는 소리만찬이란 밥상 위에 ‘절규’라는 새로운 메뉴가 추가 되었으니 나는 정말 행복하다.
조선조 정조 때 다산이 한창 젊었던 시절, 친구들과 얼려 죽란시사란 모임을 만들었다. 그들은 가을철 이른 아침에 연꽃이 필 때 들리는 소리를 듣기위해 서련지 연 밭에 조각배를 띄워두었던 적이 있었다. 뭉크와 내가 좀 더 일찍 태어나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과 같은 그 선비들과 조우할 수 있었더라면 참 좋았을 것을. 꽃잎에 맺힌 이슬을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떨어뜨리는 듯한 청개화성(聽開花聲)을 즐기는 그들에게 ‘절규’에서 울려오는 코러스 같은 그 장엄한 소리를 들려줄 수 있었을 텐데.
연꽃 필 때 들리는 소리나 ‘절규’에서 들리는 소리나 모두 마음의 귀(心耳)로 들어야 하는 심오한 소리지만 따지고 보면 그게 그거지 뭐. 별 것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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