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수장(淸水壯) 여관 / 강여울
오늘도 나는 내 창 맞은편에 있는 청수장(淸水壯)여관을 건너다본다. 옥상에는 빨랫줄 가득 흰 수건들이 눈부시게 펄럭이고 있다. 그 펄럭임 속으로 냇가에서 방망이질로 빨래를 하던 어머니의 영상이 일렁인다. 청수장여관은 도심 중간에 자리한 어수룩한 삼층 건물이다. 이 오래된 여관을 나는 단지 ‘청수장’이라는 이름 하나 때문에 습관처럼 눈길을 주고 있다. 청수(淸水), 그것은 유년의 멱 감던 냇물을 떠올리게 하고, 옥상에서 펄럭이는 흰수건들과 함께 나에게 막연한 세례의식을 느끼게 한다. 저곳에 들어가 몸을 씻고 햇살 냄새 가득한 수건에 물기를 닦고 잠이 들면, 이전의 모든 죄들이 다 사하여 질 것 같은 유혹에 사로잡히곤 하는 것이다.
청수장여관 주변이 어둠으로 번지면 초록, 빨강 네온불이 켜진다. 늘 어둑하고 반쯤 가려진 입구를 언제 스며들었는지 몇 개의 창문도 어둠을 밀어낸다. 청수장여관을 바라보는 내 맘에도 저절로 호기심의 등불이 켜진다. 불 켜진 창문은 흔들리는 그림자 하나 없이 고요하다. 고요의 나라에 머물고 있는 저 방안은 내 안에서 깨끗한 도화지가 된다. 내 상상의 크레파스가 날렵하게 움직인다. 도화지에 아담과 이브가 알몸으로 뒹굴던 에덴동산과 그 동산을 가로지르는 태초의 냇물이 흐르고 온갖 물고기들이 헤엄쳐 다닌다. 청수, 그 맑은 물속을 지치도록 첨벙이거나 동산을 뛰어다니는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의 시간, 가식의 옷이나 숨 막히는 단추도 없는 그 때로 나는 돌아간다.
한 친구는 불륜이나 로맨스가 아닌 삶의 한 의식처럼 여관을 찾는다고 했다. 또 다른 지인은 남자와 여자의 만남이란 어떤 명분을 내세우더라도 결국은 여관에 함께 들어가는 것이지 않겠냐고 했다. 남자는 물리적인 만족을 갈망하고, 여자는 정신적인 만족을 갈망한다는 모순에도 불구하고 여관은 늘어만 간다. 이름도 얼마나 아름답고 환상적인가. 파라다이스, 화이트캐슬, 프렌치키스, 베네치아, 미세스로라......
이런 매혹과는 거리가 먼 청수장여관을 나는 은밀한 눈길로 바라본다. 그러면 내 생각은 방 가득히 출렁이는 물결과 두 마리 물고기의 자맥질로 파장이 진다. 육체를 적시는 땀방울과 영혼의 저 밑바닥에서 솟구치는 교성으로 방안은 뜨겁다고 해도 좋다. 몸과 몸이 벌이는 정사, 그것은 불륜과 사랑 이전의 순수를 갈구하는 짐승의 울부짖음, 태고 적 영혼이 찢어발기는 슬픔이 아닐까.
채울 수 없는 삶의 배고픔이 드리우는 내 욕망의 낚싯대는 늘 비어있다. 어디를 가도 날로 치열해지는 경쟁과 확신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방황하는 오늘, 밤을 편안하게 보낼 고향 언덕이 그립지 않은 이 누구일까. 날로 늘어만 가는 여관을 보면 이 시대에 허기진 영혼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몸으로라도 채우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허기와 갈증들이 이 시대에 팽배해 있음이다. 아무리 자맥질해도 결코 닿을 수 없는 현실과 영혼의 거리를 미친 듯이 몸으로라도 닿아보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결코 닿을 수 없는 거리, 완전하지 않은 사랑, 여전히 남는 허기에 몸부림치다 사람들은 다시 여관을 찾게 되는 것이 아닐까. 안의 뜨거움과 자동차들의 질주가 끊이지 않는 도로를 앞에 두고도 청수장여관은 언제나 고요하다.
이 밤, 내 깊은 한 생각이 건널목 건너 청수장여관에 들어 물고기가 된다. 오랜 방황으로 상처와 오염에 물든 비늘을 흔들어 유년의 냇물로 거슬러간다. 상처투성이 몸과 몸을 섞어 이 세상에서 채울 수 없는 사랑을 확인하는 동안 영혼을 들쑤시던 불만의 종기가 터지고 뜨거운 입술로 비명이 쏟아진다. 숨기려 할수록 더 잘 곪는 욕망을 터뜨리고, 마침내 맑은 물에 몸을 씻고 수건을 편다. 그리웠던 햇살냄새, 순수의 향내로 젖은 몸을 닦는다.
나른하게 데워지는 생각을 가르며 팔짱을 낀 남녀가 등불처럼 여관을 걸어 나온다. 입술이 파래져 물 밖으로 나온 아이처럼 나는 그들이 사라진 쪽을 계속 바라본다. 캄캄한 창문, 내일도 청수장(淸水壯)여관 옥상에는 만선의 기쁨을 알리는 돛처럼 새하얀 수건들이 펄럭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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