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로운 꽃엔 가시가 있다 / 정목일
나는 장미, 찔레, 탱자, 은목서 꽃을 좋아한다.
꽃도 좋지만 향기에 취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향기가 좋은 꽃은 가까이 가는 것을 허락하지만, 함부로 손댈 수 없게 가시가 있다. 존엄과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무턱대고 다가서다간 찔려 비명을 지르거나 피를 흘리고 물러서게 된다. 장미, 찔레, 탱자나무 줄기에 촘촘히 초록빛 가시들이 돋아나 창을 겨누고 있다. 꽃에 코를 가져가려다 움칠 놀라면서 간신히 향기를 맡는다.
꽃들은 가시 때문에 아름다움을 보존할 수 있고 향기를 낸다. 가시는 꽃을 지키기 위한 자구책의 비상선이다. 가시엔 독기나 냉기보다 긴장과 첨예한 눈빛이 있다. 긴박감이 서려 있다.
아름다움과 향기로움은 선망의 대상이다. 보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놓아둔다면 꽃은 금방 퇴색되고 버려질 게 뻔하다.
장미 꽃다발엔 가시가 없다. 가시 있는 꽃다발을 바라는 사람이 있을까. 가시가 박힌 장미꽃다발을 받는다면, 상대방은 어떤 표정일까. 가시는 적의를 품은 날카로움과 반발의 표정으로 다가선다. 그러나 장미꽃은 가시가 있어야 야성미가 넘치고 더 고혹의 향기가 풍겨난다. 탱자 꽃향기는 은근하면서 매혹적이다. 하얀 꽃들이 탱자나무 가시 속에 숨어 향기를 뿌린다. 탱자나무는 철조망보다 효과적인 울타리가 돼준다. 철조망은 절단기로 간단히 끊어버릴 수 있지만, 탱자나무 울타리를 넘어 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학창시절, 고향 진주엔 탱자나무 울타리 집이 더러 있었다. 남강 가에 탱자나무 울타리 집에 사는 친구가 있어서, 봄이면 곧잘 놀라갔다. 저녁 무렵이면 탱자나무에 참새들이 즐겨 찾아들곤 했다. 참새들은 어떻게 가시나무 울타리 속으로 자유자재로 날아다닐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가을이면 탱자를 따내기 위해 긴 작대기로 툭툭 치면서 땅에 떨어진 것을 줍곤하였다. 가시 속에서 얻어낸 것이기에 더욱 귀한 느낌이었다.
찔레는 들장미로 불려진다. 장미가 온실이나 정원에서 길러낸 공주 같은 꽃이라면, 찔레는 들판에서 자란 산골 소녀 같은 꽃이다. 산이나 들판이 초록으로 물들여갈 적에, 짙고 화사한 꽃향기를 봄바람에 풍겨주는 찔레꽃-. 연인의 살 내음처럼 짜릿한 향기를 따라 가면 찔레꽃이 피어있다.
찔레꽃은 몸을 낮추어 자갈밭이나 비탈진 곳을 가리지 않는다. 몸을 땅바닥에 밀착시키고 있지만 넝쿨을 뻗어 어느 곳이라도 다가설 것 같은 강인한 모습을 보인다. 향기에 취해 꺾으려 하면 가시에 찔려 피를 흘리고 만다. 들꽃이라 마음대로 하려든다면 낭패를 당하게 된다. 완강한 가시의 저항에 물러날 수밖에 없다.
은목서는 향기가 일품이어서 최상급 정원수로서 대접받는다. 정원에 은목서가 한 그루 있다면, 꽃이 피어있는 동안엔 행복하게 취할 것이다. 진하고도 맑은 향기는 마음을 황홀하게 해준다. 은목서 향기엔 맑고 깊은 도취가 있다. 저속한 향기가 아니라, 오래 동안 마음에 남는 맑은 향기이다.
은목서 나무엔 가시가 없는 대신 잎에 뾰족한 톱니가 돋아나 있다. 잎에 날카로운 모서리가 있어서 가시 역할을 해낸다. 노란 꽃은 금목서, 흰 꽃은 은목서이다. 향기가 만 리를 간다고 해서 만리향이라고 부른다. 가시가 없다고 함부로 꺾을 수 없게 잎사귀에 톱니가 나서 꽃을 보호한다.은목서 잎들이 부드럽고 아름답고자 했다면 꽃과 향기를 온전히 보호할 수 없다.
나는 향기가 좋은 꽃을 사랑하지만, 내 가슴엔 꽃보다 넘쳐나는 향기를 간직하고 있다.
어머니는 언제나 자식에게 가시 같은 존재였다. 자식이 향기로운 꽃이 되길 바라고, 자신은 가시가 되길 주저하지 않는다. 바깥으로 시퍼런 가시가 되어 자식을 지켜주는 방패막이가 돼준다. 꽃이 아름답고 향기로울 수 있었던 것은 제 힘만이 아닌, 가시의 보호와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 마음속엔 어머니라는 향기로운 가시가 남아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생각해 보니, 정작 향기로운 것은 푸른 가시이다.
나는 ‘어머니’라는 시들지 않는 향기의 가시를 품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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