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고향이 없다 / 전혜린
아스팔트 킨트(아스팔트만 보고 자란 도회의 고향 없는 아이들)라는 단어는 나에게도 쓰일 수 있는 명칭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부임지를 따라 이북의 끝인 신의주에서 보낸 2년간은 내 어린나이와 함께 잊혀지지 않는 그리움 때문에 고향이라는 글자를 볼 때면, 언제나 내 뇌리에 떠오르는 것은 신의주다. 초등학교 1학년을 수료했을 때 나는 서울을 떠나서 그곳으로 갔다.
신의주는 소위 신흥 도시로서 일본인들이 계획적으로 만든 합리적이고 관념적인- 지금 생각하면 숨갑갑한 도시였는지도 모른다. 도로가 꼭 자를 대고 그린 듯 정확하고 구획이 정연했으며 집의 크기도 똑같았고 재료는 모두 붉은 벽돌이 사용되어 있었다. 그러나 내가 좋아한 것은 그 깨끗하고 체계적인 주택가가 아니었고 중국인촌과 압록강이었다.
중국인촌은 도심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고 갈대밭이 무성해서 물이 흐르는 것도 보이지 않게 덮여 있는 폭이 좁은 강이 흐르는 곳에 있었다. 강가의 갈대를 헤치면서 따라 올라가면 중국인들의 오두막들이 죽 즐비하게 서 있었고 신비스러운 억양의 중국어가 대소음을 이루고 있었다.
나는 학교에 갔다 오면 늘 그곳으로 갔다.
그리고 하늘 높이 솟은 포플러 나무 밑에 앉아서 사탕 수수를 씹으면서 공상에 잠겼었다.
지식을 높이 평가하는 이상주의자인 아버지는 언제나 나를 자랑스럽게 여기시고 귀여워해 주셨다. 아버지는 장녀인 나를 학교에도 종종 데리고 갔고 이발소에도 꼭 데리고 가서 머리를 깎는 것을 지켜 보셨다. 백러시아계의 양복점에서 꼭 소공녀가 입을 것 같은 레이스 원피스를 사 준 것도 아버지였다.
3- 4세 때부터 한글 책과 일본어 책을 전부 읽을 수 있도록 손수 가르쳐 주신 아버지는 내가 공부 이외에 딴 일을 하는 것을 허락 안 하셨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계실 때는 나에게 심부름 한 번 못 시켰다. 손에 물 하나 안 튀기고 내 방에서 공부만 하는 것, 아버지가 한없이 아낌없이 사다 주는 책을 읽는 것이 내 생활의 전부였다. 이 유년기의 습관성은 중*고*대학생 시절을 통해 죽 견지되었다. 내 한마디는 아버지에게는 지상 명령이었고 나는 또 젊고 아름다웠던 남들이 천재라 불렀던 아버지를, 그리고 나를 무제한으로 사랑하고 나의 모든 것을 무조건 다 옹호한 아버지를 신처럼 숭배했었다.
나는 응석받이 어린애였다. 나에 대한 편견 때문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자주 말다툼한 것을 보아도 그것을 알 수 있다.
물질, 인간, 육체에 대한 경시와 정신 관념, 지식에 대한 광적인 숭배 그리고 내 내부에서의 그 두 세계의 완전한 분리는 그러니까 거의 영아기부터 내 속에서 싹트고 지금까지 나에게 붙어 있는 병인 것이다.
아버지는 가끔 나를 데리고 부둣가에 가셨다. 내 눈에 바다보다도 더 넓게 보였던 압록강이 녹색으로 흐르는 것을 바로 눈 앞에 볼 수 있는 곳엔 백러시아인이 경영하는 다방이 많았다. 벽돌 페치카가 놓인 다방에서는 축음기를 틀고 금발이 허리까지 오는 러시아 처녀가 음악에 따라서 노래하고 있었다. 스텐카라진 같은 러시아 민요였던 것 같다. 거기에서 나는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어떤 날 나는 부둣가에서 뗏목이 떠 내려 오는 것을 본 일도 있었다. 집채보다 큰 뗏목에는 수 명의 남자들이 타고 있었는데 모두 검붉게 탄 건강한 체구들이었고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뗏목이 안 보이게 될 때까지 부둣가의 콘크리트 바닥에 앉아서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지 전신이 뒤흔들리는 듯한 감동이 내 어린 마음을 찔렀다.
먼 데에 대한 그리움, 어디론지 멀리 멀리 미지의 곳으로 가고 싶은 충동은 그때부터 내 마음 속에 싹튼 것 같다.
그때부터 내 눈은 실향병의 눈, 슬픈 눈으로 된 것 같다.
어쩌면 내 천성에 유랑 민족 집시의 피가 한 방울 섞여 있는지 모르고, 그것이 이국적 도시에서 보낸 유년기로 인해 눈뜨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혼자 살고 싶었다. 내 일생을 바치고 싶었다. 자유롭게......
대학생이 된 후에도 나는 그런 결심을 되풀이했었다.
그러나 운명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곳으로 우리를 데리고 간다. 우리의 의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자유롭지는 않다. 우리가 생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생이 우리를 형성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기치 않았던, 때로는 소망치 않는 방향과 형식 속에 생이 형성해 놓는다. 논리의 수미가 일관된 생을 우리는 희구한다.
그러나 생의 테제와 안티 테제는 논리에서처럼 당연한 일의적 단계를 밟지 않는다. 그러기에는 생은 너무나 혼돈적이고 어두운 밤의 측면과 꿈과 동경 등으로 가득 차 있다.
작은 우연이 일생을 결정하기도 한다. 인간은 유리알처럼 맑게, 성실하고 무관심하게 살기에는 슬픔, 약함, 그리움, 향수를 너무 많이 그의 영혼 속에 담고 있다.
의식과 무의식이 일체가 되고 그와 객체 관계가 지양되는 투명한 순간은 우리에게 그렇게 자주 주어지지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분열된 의식과 전우주에 대한 고독감에 앓고 있다. 인식과 플라톤이 말하는 에로스와 합하려는 노력만이 우리를 고독에서 구출한다.
그러나 우주선이 달세계로 가는 시대에 사는 인간은 영혼의 소박함을 잃은 지 오래된다. 사랑도 변형된 호기심인 경우가 많고 사랑의 행위에서도 지적인, 너무도 지적인 것이 현대인이다. 누구나가 자기의 원칙과 독백 속에 감금되어 있다. 자아에 망집하고 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진공관 속을 꿰뚫는 것은 현대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렸다. 기적같은 희귀한 몇 개의 순간에서만 우리는 변신을 한다. 헌신과 희생이 가능해진다. 그 순간이 지나면 생은 다시금 어두운 것, 무표정한 것으로 된다. 그 속에서 아무 관련도 없이 제각기 인간은 산다. 고독한 탐구를 계속한다. 죽음을 과학적으로 탐구한다. 몽상한다.
생은 슬픈 것인지도 모른다. 회한, 모든 후회는 결국 존재의 후회로 귀결된다.
태어났음의 비극은 피조물성 속에 있는 균열 즉 시간과 공간으로 제한된 일정 기간의 생명이 신비한 힘에 의해서 우리의 의식 없이 우리에게 부여되어 있다는 불가지성 속에 있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짧은, 그러나 주관적으로는 지루하게 긴 우리의 생에서 그래도 진주빛 광채를 지닌 기간이 있다면 그것은 유년기리라.
유년기 그것은 누구에게나 실락원이다.
'더 이상 어린이가 아니라는 것은 부도덕한 일이다'라고 어떤 시인은 말했다. 어린 시절은 의외의 놀라움, 신비와 호기심, 감동에 넘친 지루하지 않은 한 페이지다. 그리고 우리는 몇 살이 돼도 그 장을 펼쳐 보고 싶어진다.
영원한 그리움, 그것은 고향에 대한 것이다. 원류에 대한 동경, 영원의 고향에 대한 거리감에 앓는 것, 그리고 그곳으로 귀향하려는 노력을 플라톤은 향수라 했다.
어릴 때 우리는 모두 초시간적이고 불사신이었다. 존재의 상처를 모르는 이상주의자였다. 성장한 뒤에도 어린 마음을 상실치 않는 이상주의자, 즉 영원한 유아는 현실과 부딪칠 때 늘 생사를 건 모험을 하게 된다. 키에르케고르는 말했다.
"어린애로서 즉 이데알리스트로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은 지난한 일일 뿐더러 종종 카타스트로프(파국)를 가져 온다."
생에 좌초한 '어린애들' 위에 디디고 서서 개가를 올리는 것은 어느 세대에나 영원한 속물들, 인간을 목적으로 알지 않고 수단으로 아는 바리새인들, 현명한 준법자들, 투철한 리얼리스트들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마음의 고향이, 이데아가 없다.
따라서 유년기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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