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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1

[좋은수필]황혼 / 배형호

황혼 / 배형호



돈 봉투를 받았다. 할아버지는 노란봉투에 공사대금을 넣어서 주었다. 돈은 세어 보아야 한다는 것을 그냥 공손하게 받아왔다. 할머니가 세어서 건넨 돈을 할아버지가 받아서 다시 확인하고 넣어주는 돈을 또 셀 수는 없었다. 집으로 돌아와 봉투속의 돈을 꺼내어 본다. 수표도 한 장 없이 지폐로 봉투 한 가득 든 돈에서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냄새가 난다. 숫자상 계산은 맞다. 그러나 봉투 속에 들어있는 돈의 모양을 보면 더 받아 온 것 같다.

동네에는 칠순을 넘긴 노부부가 살고 있다. 할아버지는 저녁에 출근을 한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의 공장에서 야간 경비를 하고 아침이면 집으로 온다. 집으로 돌아오는 할아버지의 자전거 짐받이에는 빈 종이 박스와 고물상에다 팔수 있는 물건을 한 자전거 가득 싣고 와 마당 한 곳에 모은다. 오늘도 할아버지는 기름걸레질로 반질반질 하게 닦은 자전거에 넘치도록 싣고 온 고물들을 내린다. 할머니는 건너다보이는 체육공원 옆  자리를 개간해서 채소를 심고 가꾼다. 할아버지 댁에서 며칠 동안 집수리를 하면서 본 풍경이다.

먼저 노후 된  배관 교체를 위해 수도관이 지나갈 자리에 놓인 가구와 장애물을 치운다. 주방 찬장 안에는 오래전에 사용하던 그릇들이 가득하다. 식탁에서 밀려난 그릇들이 예전에는 식구들이 많았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찬장위에 얹혀있는 큰 솥과 냄비들도 사람을 그리워하는 듯 식탁을 비스듬히 내려다보고 있다.  찬장 안에서 멈춘 시간을 간직한 채 잠들어 있는 빈 그릇을 깨워본다.

고물상 리어카를 몰고 온 할아버지는 모아두었던 종이와 고철 등을 고물상으로 실어 날랐다. 할아버지는 몇 장의 지폐로 그 동안의 수고를 보상받으며 무릎관절의 아픔도 잠시 잊을 것이다.

옥상 바닥 보수 공사와 물탱크를 철거하러 옥상으로 오른다. 옥상으로 오르는 계단 밑 공간에는 삽, 괭이, 깔구리, 호미 등 잘 정비되어 걸려있는 농기구는 계절이 바뀌기를 기다리며 땅을 향해 목을 빼고 있다. 볕 잘 드는 곳으로 보고 가지런히 놓인 많은 장독을 옮겨야 한다. 단지들의 뚜껑을 열며 크고 작은 단지마다 속을 채우고 있는 할머니의 삶을 본다.

말린 산나물, 고사리, 콩, 잡곡, 소금, 간장, 된장. 그 중에서도 둘이 들어 옮기기도 버거운 된장  독이 세 개나 되었다. 이 많은 된장을 두 분이 다 먹지는 못 할 것이다. 간장과 된장은 자식들에게 나누어 주겠지,

 단지를 가득 채우고 있는 빛 고운 된장을 보며 부모는 콩 같은 존재인가 싶다. 자기 몸을 다지고 다져서 간장을 주고도 된장으로 남아  남김없이 주고 가는 것이 부모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든다.

빨랫줄엔 색 바랜 할머니의 치마와 할아버지의 회색 바지가 꽃무늬 남방을 사이에 두고 햇살이 따사로운데 흔들리는 바람에 할머니 치마엔 꽃잎이 진다.

할머니는 가뭄이 들지 않고 잘 자란 채소를 아파트 입구에서 팔고 있다. 음료수를 그 돈으로 사 왔다. 나는 노란 오렌지 쥬스를 마시면서 할머니의 푸른 채소 맛을 느낀다.

마지막 날 할머니는 정리가 다 된 주방에서 점심을 준비했다. 찬장 안에서 음식 냄새만 맡고 있던 그릇들은 음식이 그득히  담기고, 농사지은 채소와 옥상의 된장, 그리고 삼겹살을 구워 우리는 큰 스텐 그릇에 가득 담아 주는 밥을 남김없이 다 먹었다.

거실 한 쪽으로 걸려있는 가족사진은 두 분의 젊은 시절을 붙잡아 두고 있지만, 할아버지의 세월은 흐른다. 흑백사진 속 자신에 찬 아버지와 어머니, 그 앞에 나란히 섰던 자식들은 사진 속을 나와 어머니 아버지가 되어서 더 커진 가족사진 속의 할아버지 할머니 옆에 나란히 서있다. 사진 속 두 분은 인자하게 웃고 있는데 방안에서 가구를 정리하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힌다.

일은 다 마쳤다. 돈 봉투를 받았다. 봉투는 장롱 속에서 오랫동안 있었는지 좀약 냄새가 난다. 접고 접은 돈을 편 흔적에서 오랫동안 모아 온 돈이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할아버지 이마의 깊은 주름살처럼 접힌 흔적에서 공장과 집을 오가며 거두어 온 고물을 팔아 모은 할아버지의 땀 냄새가 난다. 돈의 모서리가 구겨지고 접힌 부분을 바로 펴 본다. 할머니 손등의 잔주름처럼 펴진 돈에서 집과 채소밭을 바쁘게 다녔을 할머니의 가쁜 숨소리가 들린다.

 봉투속의 돈과 함께 따라온 두 분의 삶을 생각하면 더 받아 온 것 같기도 하고, 겨울을 따뜻이 날수 있게 해주고 기술과 돈을 바꾸어 왔는데도 마음은 개운하지 못하다.

이제 할머니가 소원하는 싱크대를 바꾸어 주기위해 할아버지는 어제처럼 저녁이면 출근을 할 것이다. 또 할머니는 채소밭에서 손으로 벌레를 잡고 김을 맬 것이다.

고령화 사회로 걱정들을 하지만 스스로 노후를 꾸려나가는 두 분을 보면서 집에서 노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았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젊어서 해보지 못했던 것들을 하나하나 이루어가며 살아가는 두 분이 신혼처럼 보이기도 해 웃음 지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