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우(鬪牛) / 孟蘭子
어느 여름날 오후였다.
찬물로 몸을 씻고 나와 리모컨으로 TV의 아무데나를 누른다. 권투가 나왔다. 두 남자가 육탄적인 싸움을 벌인다. 때리고 맞는 행위, 무더위의 권태를 한 방으로 날려 버리기엔 괜찮은 방법인 것도 같다. 마침 라디오에서 음악의 곡명이 바뀐다. 경쾌한 행진곡 풍의 ‘투우사의 노래’다.
‘토레아돌(Toreador)’로 이어지는 활력이 넘치는 노래, 권투의 동작도 이 노래에 맞추고 보니 춤이 되는 것 같다. 노래를 흥얼거리며 나는 하릴없이 그들 중의 한 사람을 소로 대치시켜 본다. 입에 물린 마우스피스, 윤기 흐르는 검은 피부, 단단한 근육질의 황소 한 마리가 거기 서 있다.
그러나 아무래도 투우는 되지 못한다. 짧은 발빠름, 싸움이 조급한 권투에 비하면 투우는 그 격이 다른 것이다. 상대와 대칭으로 균제(均齊)를 이루면서 그놈을 천천히 무대 중앙으로 끌고 나와 선회하면서도 눈으로는 죽음을 가름해야 하는 일촉즉발의 긴장과 그러면서도 침착한 스텝으로 이어지는 우아한 동작, 거기에다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복장이라니.
주역(主役) 투우사인 마타도르의 복장은 조역인 반데릴레로나 피카도르보다 훨씬 화려하다. 짧은 상의와 조끼, 무릎까지 오는 몸에 꼭 끼는 바지는 금과 은의 장식, 그리고 비단으로 치장되어 있다. 그 위에 레이스로 만든 셔츠웨이스트를 입고 산호색 스타킹을 신는다.
언젠가 영화에서 본 미남 배우 타이론 파워의 투우사 분장은 아름다움의 극치였다. 햇볕에 반사된 그의 옷은 황금색 비늘로 번쩍였다. 성장(盛裝)은 마치 죽음을 위한 제의(祭儀) 같다. 아무튼 투우의 목적은 소를 죽이는 데에 있다. 그러나 소만 죽는 게 아니다. 호셀리토처럼 세계적으로 손꼽히던 투우사도 결국엔 투우장에서 죽고 말았다. 해마다 경기장에서는 많은 투우사가 투우 대신 죽어나기도 한다. 생명이 전제되었기에 관중들의 환호는 더 큰 것인지 모른다. 자극과 환호, 그것은 비례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 내부에는 파괴적인 욕구가 똬리를 틀고 있는 것 같다. 거기에 죽음에 대한 욕구도 붙어 있다. 들것에 실려나가는 투우사나 KO된 권투선수의 뭉개진 얼굴을 보며 여러 가지 감정을 경험하게 되는 것은 나만은 아닐 것이다.
환호와 공포, 전율과 절망을 맛보기 위해 우리는 비싼 요금을 치르고 관람석에 앉아 있지 않은가.
스페인 특유의 강렬한 햇볕이 내리덮는 원형 경기장. 그 아래 펼쳐지는 한판 죽음의 무도(舞蹈). 헤밍웨이가 투우에 매료된 것도 바로 이 ‘격렬한 죽음’의 이미지 때문이라고 한다. 극도의 쾌락은 파괴의 형식을 수반하는 것 같다. 죽음에 대한 파괴 또한 사람들은 아주 천천히 진행되기를 희망한다. 그래서 유능한 투우사의 신기(神技)란 소를 빨리 죽이는 데에 있지 않고, 위험할지라도 보다 뿔 가까이에 접근하여 붉은 망토를 휘두르며 약 올린 소를 얼마나 오래 지속적으로 그리고 우아하게 피하는 가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죽고 죽이는 긴박한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태연함을 가장한 마타도르의 여유와 서로의 몸이 부딪치는 그 아슬아슬한 모습을 관중들은 환호하는 것이리라.
우리에게 이런 재미를 더하기 위해 특별히 사육된 사나운 소가 장내에 등장하면 보조 투우사인 피카도르가 먼저 말을 타고 달려나가 창으로 황소의 목덜미를 찌른다. 인간과 동물간의 위험한 싸움이기 때문에 황소의 체력과 속도감을 떨어뜨리고 목을 내려뜨리게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그 다음은 반데릴레로가 화려하게 색칠을 한 긴 작살을 세 개씩이나 들고 나와 목이나 어깨에다 그것을 차례대로 꽂는다. 이윽고 장내(場內) 가득히 트럼펫이 울려퍼지면 그때서야 주역인 마타도르가 등장하여 죽음의 한판 무도를 펼치면서 황소의 목덜미에 단도를 찌르게 된다. 검은 황소의 등에서는 붉은 선혈이 흘러내린다. 동물의 심장이 심하게 뛰면 등에 꽂힌 칼도 따라서 부르르 하고 전율한다. 전율(戰慄)에서 오는 환희, 어쩌면 그것은 엑스타시일지도 모른다.
신화(神話)에서 황소는 남성의 심벌이었다. 어느 날 크레타 섬의 왕 미노스의 아내, 파시파에는 황소에게 심한 욕정을 느낀다. 아테네에서 온 장인(匠人) 다이달로스가 파시파에에게 나무로 된 암소 한 마리를 만들어 주었다. 속이 비어 있는 암소의 몸 속으로 들어간 파시파에는 마침내 그 황소와 정을 통할 수 있었다.
여자들의 내면에는 이런 파시파에의 성향이 잠재해 있다고 어느 철학자는 일갈했다. 구릿빛 살결에다 갸름하게 찢어진 카르멘의 정욕적인 눈에서 나는 파시파에의 암소 한 마리를 발견한다. 그녀에 의해 힘없이 무너지고 마는 돈 호세는 한 마리의 숫소였다. 그는 메리메의 소설 『카르멘』 속에서 이렇게 외친다.
“나의 일생을 망친 건 너야. 내가 도둑이 되고, 사람을 죽이고 한 것은 너 때문이야. 카르멘! 나의 카르멘! 내가 너를 구하게 해다오.”
그러나 끝내 투우사 루카스에게로 마음을 옮긴 카르멘. 화가 몹시 난 돈 호세는 단도를 뽑아든다.
“…나는 이제 네 정부 녀석들을 죽이는 일도 지긋지긋해. 이번에는 너를 죽일 차례다.”
두 번을 찔렀다. 보헤미아의 짚시, 야성적인 그 여자는 두 번째 칼을 맞자 소리도 없이 쓰러졌다. 돈 호세의 단도를 맞고 그 자리에 쓰러진 건 한 마리의 암소, 파시파에였다. 파괴적인 욕망은 사랑의 다른 얼굴이었다. 관능과 죽음은 참으로 등배지간이었다. 귀가 멍멍해 오는 백색의 여름날 오후의 권태를 죽이기에는 투우가 적합할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건 바로 그때였다. 죽음보다 확실한 생의 체감(體感)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왜 내 안에 있는 파시파에적 욕구조차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
적막한 이 몸의 평정(平靜)은 무엇이란 말인가. 비누 거품이 잘 일지 않는 비누같이 되어버린 내 몸 안의 어느 부분을 더러 관(觀)해 보는 날도 있다.
창 밖엔 느릿느릿 땅거미가 지고 있다. 세월이라고 하는 이름의 닫힌 그 문(門) 안에 이렇게 나는 기대어 서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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