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화밭을 지나며 / 마종기
미국 남부의, 사투리 심하고 느리고 게으르고 후텁지근하게 무더운 조지아 주를 잘 알고 계시는지?
플로리다 주 위에 감자떡같이 앉아 있는 농투성이 인상의 조지아주. 남북 전쟁 때는 남부군의 사령부가 있었고 그래서 더 잘 알려진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무대였던 곳, 카터 대통령의 고향, 1996년인가 올림픽이 열렸던 곳, 복숭아와 옥수수와 담배와 땅콩과 목화와 피칸이 여름부터 초겨울까지 지천으로 쌓이는 곳.
그 옛날 미국 남부의 낯익은 풍경같이 흑인 노예들이 영가를 부르는 대농장 플랜테이션이 아직도 산재해 있는 주. 그 조지아 주는 나와 아무런 인연이 없지만 우연한 기회에 늦가을의 부산한 기분을 다스리며 만났던 어느 하루의 인상은 참으로 푸근하게 아직도 내 마음 한 복판에 자리하고 있다.
늦가을의 저녁에는 여섯시가 채 되기도 전에 완전히 져버리고 성질 급한 초승달이 살포시 보이기 시작하던 그런 시간. 지방 간선 도로를 달리던 내 시야가 밝은 탐조등 같다는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하늘 환하게 다가온 것은, 알고 보니 아직 추수를 끝내지 않은 한두 에이커의 씨받이 목화밭이었다. 초승달빛이 역할을 조금은 했겠지만 다시 보아도 그것은 흡사 자연이 만든 커다란 탐조등이었다.
침침하게 가라앉기 시작하던 내 마음에 갑자기 환한 등을 켜준 목화밭. 그 날 밤 넓은 목화밭에 깔린 흰 솜꽃 속에서 비치던 빛은 그대로 내 피곤한 세상에 반사되어 밝고 시원하게 가슴을 열어 주었다.
갑작스럽게 나를 환하고 맑게 씻어 준 기분이 너무 싱그럽고 놀라워서 나는 차를 돌려 다시 광활하게만 느껴지던 목화밭 근처로 가서 짙은 감동으로 멀건히 솜꽃들을 보았다. 아니, 나는 어두움 속에서 아름다운 빛을 보고 있었다.
그때, 어두운 밤을 눈부시게 밝히는 목화밭은 잔잔히 내게 타일러 주었다. 어두워지지 마라, 생활도 생각도 그리고 네 영혼까지도 어두워지지 마라. 어두워지지 마라, 어두움을 이겨내는 목화밭이 되어라. 아무것도 일어날 수 없는 이 밋밋한 촌구석의 한밤에 나는 치솟는 눈물을 감추면서 혼자서 자꾸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렇다, 어두워지지 말자, 언제나 어두워지지 말자, 무슨 일이 있어도 어두워지지 말자.
오랜만에 산뜻한 기분이 되어 근처의 모텔에서 하룻밤을 지낸 다음날 아침, 나는 갈 길을 천천히 준비하면서 그래도 아쉬운 마음을 떨칠 수 없어 지난밤 뜻밖에도 내게 흐뭇한 시간을 선물해 준 목화밭을 향했다. 그러나 확실히 같은 목화밭인데도 밤에 보았던 빈 어두움 속의 찬란한 빛남은 어디로 가버리고 초라하리만큼 볼품 없는 목화가 옹기종기 모여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내가 보았던 찬란한 빛과 길이 겨우 이것이었나, 마음 한편이 섭섭해져 목화 한 송이를 잡고 손으로 만지작거리자니 문득 손끝에 전해 오는 목화송이의 부드러움. 아, 이 부드러움! 그렇구나, 이 못생긴 부드러움이 바로 내 빛이고 희망이었구나. 노자(老子)가 말했던가,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고.
하루 이틀 만에 노란 크림빛 꽃을 잃고 난 다음 몇 달을 정성으로 키운 자방이 터져서 하얗게 피어나는 목화. 장미나 백합같이 아름답지도 않고 요염한 향기를 자랑하지도 못하지만 따뜻하고 풍성한 목화는 자기를 다 주어서 부드러운 촉감으로 우리의 추위를 막아 주는 옷이 되지 않는가. 과학과 문명이라는 수레바퀴 아래서 세상의 만사가 간단한 숫자로 계산되고, 손해와 이익, 네 편과 내 편만으로 정의가 결정되는 어색해져 버린 우리의 요즘 세상. 그렇구나, 이 목화는 어리숙한 풍성함과 따뜻한 심성으로 우리의 피부에서부터 몸 속의 모든 것까지 조건 없이 안아 주는구나. 그리고 밤이면 어두움을 이겨내는 빛이 되어 우리의 정신까지 일깨워 주는구나.
문득 밖을 보니 또 한해가 마지막 장을 넘기고 있다. 이룬 것도 한 것도 없이, 말없이 길 떠나는 외로운 방랑자같이 또 한 해가 지나가는구나. 그러나 오늘은 갑자기 목화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깊은 열망에 내 몸이 더워 온다. 목화같이, 저 조지아 주의 목화같이, 여유롭고 풍성하고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다. 엉성하기는 하지만 따뜻한 마음으로 무엇인가 베풀며 사는 사람이 되고 싶구나.
'수필세상 > 좋은수필 1'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좋은수필]달이 떠 있는 쪽으로 가시오 / 안도현 (0) | 2009.11.03 |
---|---|
[좋은수필]멀고 눈물겨운 나의 꿈 / 박범신 (0) | 2009.11.02 |
[좋은수필]투우 / 맹난자 (0) | 2009.10.30 |
[좋은수필]터널 / 신성애 (0) | 2009.10.29 |
[좋은수필]황혼 / 배형호 (0) | 2009.10.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