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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1

[좋은수필]달이 떠 있는 쪽으로 가시오 / 안도현

달이 떠 있는 쪽으로 가시오 / 안도현

 

 

 

스물 몇 살 때쯤에 나는 시골에 사는 친구네 집을 찾아가다가 밤에 길을 잃었다.

여치 소리가 귓가에 톱밥처럼 쌓이는 가을이었다. 시외버스에서 내려 15분 정도 걸으면 친구네 집 불빛이 보이겠거니, 하고 산길을 걷기 시작했는데 그만 길을 잘못 접어들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30분, 40분을 걸어도 마을 입구에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있는 친구네 마을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날 밤은 달이 무척 밝아서 길가의 수수밭에 도열한 수숫대들이 달빛 속에 모가지를 늘어드리고 있는 풍경이 선명하게 보였다. 수수밭으로 바람이 지나가자, 수수 잎사귀들이 서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한 시간 정도 산길을 걸었을까. 제법 큼지막한 마을이 하나 산자락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나는 마을 입구에 있는 불 켜진 집을 찾아가 주인을 불렀다. 그러고는 길을 잃었는데 어디로 가야 하는지 여쭈러 왔다고 정중하게 말했다. 방안에는 분명히 백열등이 켜져 있었으며, 인기척을 느낄 수 있었는데도 주인은 대답이 없었다.

나는 다시 친구네 마을 이름을 대며 그곳으로 가는 길을 물었다. 그러자 잠시 후에 방문을 빼끔히 열고 중년 남자가 말했다.

“달이 떠 있는 쪽으로 난 길을 계속 따라가시오.”

그가 겨우 반 뼘도 채 안될 정도로만 문을 열었기 때문에 나는 그의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다. 길손이 아무리 밤중에 길을 물었다 하더라도 재워 주지는 못할망정 이건 너무 하는 것 아닌가. 적어도 툇마루 끝에라도 나와서 내가 찾아가야 할 길을 소상히 가르쳐 주는 게 사람의 도리가 아닐 것인가. 참 인정머리도 없는 사람이구나, 싶어 나는 화가 났다. 게다가 무턱대고 달이 떠 있는 쪽으로 가라니!

하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달이 떠 있는 쪽으로 난 길을 따라 나는 무작정 걸을 부밖에 없었고, 한참만에 친구네 집에 당도하게 되었다. 나는 친구에게 그 인정머리 없는 남자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친구는, 그 사람은 아마 인정이 많은 사람이 아니겠느냐며 웃었다. 들어 본즉 내가 그날 밤에 길을 잃고 찾아갔던 곳은 나환자촌이었던 것이다.

친구의 말을 듣고 나서 나는 잠시나마 원망하는 마음을 품었던 그 집주인의 세심한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낮선 길손이 자기의 모습을 보고 놀라지 않게 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얼굴로 나에게 길을 가르쳐 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