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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1

[좋은수필]사랑은 눈 오는 밤에 / 양주동

사랑은 눈 오는 밤에 / 양주동

 

 

 

사랑은 겨울에 할 것이다— 겨울에도 눈 오는 밤에 눈 오는 밤이어든 모름지기 사랑하는 이와 노변(爐邊:화롯가)에 속삭이는 행복된 시간을 가지라. 어떤 이는 사랑이 나란히 걷는 중에서 생장한다고 말하여 혹시 봄 밤의 꽃동산을 기리고 혹시 가을날의 단풍 길을 좋다 하지마는, 나는 단연코 설야(雪夜)의 노변(爐邊)을 주장하는 자이다. 왜 그러냐 하면 아무리 사랑은 시간을 초월한다 하더라도, 겨울 밤의 기나긴 것은 어느 편이냐 하면 둘의 마음을 든든케 할 것이요, 더구나 노변의 그윽한 정조와 조용한 기분이며 설야에 다른 내방자가 없으리라는 자신이 서로의 마음을 가라앉게 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선(禪)과 같이 침착하고, 태연하고, 유유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에 나의 첫사랑은 나의 주장대로 설야 노변에서 선과 같이 고요히 말없이 행하여졌다. 일찍이 저녁을 마친 뒤에 방안에 흩어져 있는 약간의 서적을 서가 위에 올려놓고, 책상 위에는 수묵빛 난초 한 분을 장식하여 놓고, 차를 달이기 위하여 화로에 불을 젓노라니 가슴 속이 적이 설렘을 느낀다. 그러나 시계는 죽어도 쳐다보지 않기로 한다. 나오는 줄도 모르게 입 속으로 뜻없는 노래를 한 두 절 읇조리고 있노라니, 궐녀(厥女;‘그 여자’를 조심성 없이 가볍게 부르는 말)의 발욱 소리가 창 밖에 들려오지 않는가…… 궐녀는 나의 방문을 나직히 두드릴 만큼 그 침착한 품위를 잊지 않는다.

주인은 말없이 일어나 내방자의 망토 자락의 눈을 조심스럽게 털었다. 뜰안에는 사분사분 내리는 눈이 하마(이미) 한 자나 쌓였다. 궐녀는 망토를 벗고 말없이 화롯가에 와서 단정히 앉는다. 그러나 궐녀는 아직 말이 없다. 주인도 별로 할 말이 없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고요함을 두려워하여 혹시 ‘날씨가 매우 추우’니, ‘눈이 무던히도 많이 오’느니 한다 하자. 그것은 누가 말하지 않아도 이미 서로 알고 있는 일이 아니냐. 하물며 서로를 위로하고 서로를 하소연하는 무슨 말이랴. 우리 사이에 말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서로에게 새로운 사실이거나 교양임을 요한다. 이제 새삼스럽스레 다시 무엇을 말할 수 있으랴……

그러나 사랑은 결국 좌선은 아니리라. 그들은 애써 무슨 신통한 대화의 실마리를 찾고자 애쓰다가, 필경은 무슨 평범한 일에서 단서를 발견하여 최초의 난관을 돌파하리라. 그 다음부터는 조금도 걱정할 것이 없다. 그들은 혹 땅콩을 까며(아니, 군밤이던가?), 혹은 쵸코릿을 벗기며, 차를 마시며, 그리도 할 말이 많다. 밤은 길대로 길고, 눈은 끊임없이 그대로 내린다. 가다가 혹시 말이 끊어져야 할 고비에 이르면, 둘 중의 하나가 화로에 놓인 부젓가락을 들어 제 위에 무슨 간단한 단어나 말을 써도 좋다. 무심코 무슨 글자를 재 위에 썼다가, 제가 쓴 것에 제가 놀라, 또는 저편이 볼까 하여, 도로 얼른 부젓가락으로 지우고 마는 심사! 사람은 이러한 미묘한 정서의 경험을 위하여 구태여 그의 애인을 여름날 멀리 바닷가로 데려가지 않아도 좋다. 화롯가의 재는 이 경우에 바로 바닷가의 모래이다. 이리하여 겨울 밤은 깊은 줄도 모르게 점점 깊어간다……

사랑은 아무래도 설야 노변에서 할 것이다. 무릇 사랑에는 두 가지 전형이 있으니, 하나는 전(前) 예의 제 1장과 같은 ‘벙어리 사랑’— 일찍이 칼라일이 에머슨과 만났을 때 무언으로 손을 쥐고 무언 중에 반시(半時)를 대좌하였다가 무언으로 다시 손을 쥐고 나뉘었다는 일화가 있거니와, 사랑하는 남녀도 종종 ‘첼시의 현자(賢者)’와 ‘콩코드의 철인(哲人)’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또 하나는 드디어 제2장과 같은 ‘지껄이는 사랑’— 이 경우에는 끊임없이 속삭이는 그들의 대화가 어느덧 설야를 잠깐 지나 설조에 이르고야 말 것이니, 그들 사이의 작별의 인사는 필연적으로 듣기에도 섭섭한 “굳―나이트(good night)”가 아니요, 쾌활하고도 신선한 “굳 모닝(good morning)”이 될 것이다. 일찍이 쉘리는 재자(才子; 재주 있는 남자)였건만 이러한 묘제를 몰랐기 때문에, 내가 그날 밤 무심코 종이 위에 연필로 그적거렸던 <좋은 밤(Good‐night)>이라는 시를 지었었것다.—

 

‘굳 나이트’라고요? 아아, 천만에,

합할 이름 나누는 밤은 언짢은 밤.

가지 말고 조용히 앉아 있어요,

그래야 그게 참으로 좋은 밤이죠.

그대의 인사는 천사 같이 아름다우나,

내 어찌 쓸쓸한 밤을 좋다 이르리?

그런 말, 생각, 이해 모두 말이야,

그래야 그게 참으로 좋은 밤이죠.

해 지자 저녁부터 아침 빛까지

가까이 다가드니 두 마음에는,

사랑은 눈 오는 밤에,

사랑은 눈 오는 밤에.

밤이란 좋은 게죠, 왜 그러냐면,

그들은 ‘곧 나이트’ 말 않기 땜에.

 

쉘리의 안타까운 <굳–나이트<good–night>>의 정경이 하필 설야 노변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가 만일 로맨스를 사랑했다면, 그는 응당 나와 같이 그것들을 택하였으리라. 설야는 몰라도, 적어도 영국의 시인이면 응당 노변을 사랑할 둘 알 것이니, 저 워즈워드도 사랑스러운 <루시의 노래> 중에서 노래하지 않았는가—

 

너의 산 속에서 나는 참으로

사랑의 기쁨을 느끼었노라

나의 사랑하는 그녀는 ‘영국식 불’

옆에서 물레를 돌리었도다.

 

여기에 ‘영국식 불(english fire)’ 이라 함은 무론 그가 영국풍의 노변을 자랑삼아 그렇게 노래한 것이다. 그리고 보니, 이 호반의 대시인도 역시 ‘노변의 사랑’을 즐기지 않았는가— 시골 처녀와 일망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