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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1

[좋은수필]눈 내리는 날 / 이경담

눈 내리는 날 / 이경담

 

 

 

펑펑 눈이 내린다. 창가로 다가간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큼직큼직한 눈송이의 율동이 가볍고 경쾌하다. 앙상한 나뭇가지 위에도 차가운 땅 위에도 눈이 쌓인다. 세상이 참 아름답다. 눈이 내리는 날에는 가슴이 설렌다. 불현듯 누군가 몹시 그리워서 보고 싶기도 하고 사람 붐비는 거리를 마냥 걷고 싶기도 하다. 알 수 없는 기대로 부푼 가슴엔 잔잔한 파도가 일렁인다. 주전자에 물을 끓인다. 찻잔에서 은은한 향이 피어오르며 찻잎이 우러나는 동안 마음은 여유를 찾아간다. 따끈한 찻잔을 어루만지며 하염없이 눈이 내리는 창 밖을 본다.

눈 내리는 겨울 풍경을 보며 시인은 ‘머뭇거리지 않고 /서성대지 않고/너에게 가고 싶다’라고 읊었다. 눈처럼 천진난만한 아이의 발걸음으로 사랑하는 이에게 단숨에 달려가고픈 애절한 심정을 고백했던 여인은 ‘천년 백설이 되고 싶다‘라는 말로 영원한 사랑을 기원했다.

유독 눈이 많이 내리던 그 해 겨울 계룡산 가까이에서 머물렀다. 계룡산은 집 앞을 가득하게 가로막고 서 있는 듯 바라보였다. 함박눈은 날이 어두워가도 계속 내렸다. 눈 덮인 계룡산은 어둠 속에서 환한 얼굴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손에 잡힐 듯 더욱 가까이 다가온 산은 마치 어머니의 따스한 품처럼 어서 오라고 불렀다. 바위도 나무도 계곡도 푹신한 솜이불을 덮은 계룡산의 유혹은 강력했다. 겨울 긴 밤 지새우며 남녁 땅 동백은 붉은 꽃망울을 터트리고 빨간 꽃잎 위에 흰 눈이 내려앉았다. 눈이 그친 아침 계룡산은 간밤과 다르게 푸른빛을 머금고 손짓을 멈춘 채 저만큼 물러나 있었다.

산도 즐도 마음도 온통 하얀 세상이 되었다. 어제의 모든 흔적은 사라지고, 오로지 희고 깨끗한 순백의 세계가 겨울 햇살 아래 눈부셨다. 눈에 파묻힌 세상은 모든 움직임을 멈추고 휴면(休眠)에 들어간 듯 조용하고 평화롭고, 내 마음도 잠자는 호수처럼 고요하고 평온했다.

인도 무굴제국 황제인 샤 자한은 왕비 뭄타즈 마할의 죽음을 애통하여 무려 22년간의 긴 공사 끝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묘 ‘타지마할(마할의 왕관)’을 지었다. 아무르 강에 저녁노을 지는데 타지마할 흰 대리석 돔을 배경으로 빨간 투피스로 성장한 채 포즈를 취했던 영국 왕세자비의 아름다움은 처연해서 눈시울이 적셔왔다. 사랑하는 왕비에게 바쳐진 타지마할은 천년 사랑이 되어 뭇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끝내 왕자의 사랑을 얻지 못한 다이애나 비는 상처 입은 영혼을 안고 타지마할을 찾아가 슬픔을 달랜다.

20대 겨울 어느 눈 내린 날, 친구와 나는 부푼 가슴을 어쩌지 못하고 눈 쌓인 별판으로 나갔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사슴처럼 눈밭을 달리다가 무작정 걷기도 했다. 두 손 가득 눈을 움켜쥐어 푸른 하늘을 향해 은빛가루를 흩뿌리다가 꽁꽁 뭉친 눈덩이를 멀리 멀리 던지기도 했다. 흰 눈밭에 불타는 붉은 코트를 입고 카메라 앞에 섯던 친구, 바람에 날리던 긴 머리와 쓸쓸한 미소가 마음을 저리게 했다. 다시 만날 기약 없는 이별은 태산 같은 파도가 되어 푸르디푸른 바다를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고 갔다. 가늘어져 더욱 길어진 목이 서글퍼서 스카프를 둘러주었다. 순백의 눈밭에는 찬바람이 불었다. 순결함과 차가움, 찬 겨울날 하얀 눈밭은 소생의 기운을 듬뿍 품고 있었다. 들판을 숨이 차도록 달리다 보면 두 볼은 사과처럼 빨갛게 열고, 그런 얼굴을 마주보며 실컷 웃었다. 시린 두 볼로 환하게 웃던 얼굴엔 건강과 기쁨의 빛이 넘쳤으며 곱았던 두 손은 금세 따뜻해 왔다.

눈이 지상의 모든 것들을 덮으며 온 세상이 순백의 옷으로 갈마 입어갈 때, 우리의 마음도 하얀 눈의 순수를 닮아 간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그리워하고, 너그러워지고 따뜻해지며, 가슴은 기쁨과 감사로 충만해진다.

우리의 마음을 하얗게 순화시킨 순백의 눈이 꿈처럼 어느 날 갑자기 우리 곁에 찾아왔듯이, 쌓인 눈은 오래지 않아 지상에서 사라진다는 애절함과 안타까움을 동반하고 있다. 순백의 순수함이 지닌 순간성, 그것은 기대감이 허무감으로 바뀌는 순간이기도 하다. 모든 사라지는 것들 앞에서 우리는 작고 슬프다. 역시 사라지는 존재인 우리의 삶은 한 줄기 햇살에 녹아 사라지는 눈처럼 그렇게 허망하다. 결별에 앞서 우리는 그리움이나 추억이라는 행복한 순간을 간직한다. 비록 사라지는 덧없는 존재이며 삶일지라도 한 송이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는 순간은 그리움이나 추억의 이름으로 가슴에 남는다.

눈이 내리는 날에는 밖으로 나가고 싶다. 그러나 차 한 잔에 마음을 토닥이며 기억 속의 장면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은 순백의 눈이 지닌 아름다움 때문이기도 하고 그 아름다움의 짧음 때문인지도 모른다. 눈 내리는 이 저녁도 나는 창가에서 서성인다.

 

문정희 詩 / 겨울 사랑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

머뭇거리지 말고

서성대지 말고

숨기지도 말고

그냥 네 햐얀 생애 속에 뛰어들어

따스한 겨울이 되고 싶다

천년 백설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