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 있는 사람 / 신석정
1
나이가 들수록 격(格)이 높아가는 것이 나무다. 경기도 용문사에는 천여 년 전에 심었다는 고령의 은행나무가 있어 45미터의 키에 휴고직경(胸高直徑)이 4미터 가까이 된다니 산으로 치자면 바로 백두요, 한라가 아닐 수 없다. 뜨락에 자질구레한 나무만 심어 놓고 바라보아도 한결 마음이 든든한데 그쯤 고령의 거목이고 보면, 내 하잘것 없는 인생을 송두리째 맡기고 살아도 뉘우칠 게 없을 것 같다.
홍야항야로 일삼는 속정에 젖어 사는 것이 너무나 치사한 것만 같아 새삼 허탈을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창 앞에 대를 심어 소슬한 가을 바람을 즐길 줄 모르는 바 아니요, 또한 눈부신 장미꽃이 싫은 바도 아니요, 오색 영롱한 철쭉도 싫은 바 아니지만, 그런 관목보다는 아교목이 좋고, 아교목보다는 교목이 믿음직해서 더 좋다. 욕심껏 꽂아 놓은 나무가 좁은 뜨락에 초만원이 되어 이제 어찌할 도리가 없어 제일 먼저 장미를 담 옆으로 소개시키고 아교목의 호랑가시와 교목인 태산목, 은행나무, 낙우송을 알맞게 자리잡아 세운 것도 호화찬란한 장미처럼 눈부신 여생이기보다는 담담하기를 바라는 탓도 있지만, 차라리 그보다는 날로 거목의 몸매가 잡혀 가는 이 교목들에게 끌리는 정이 더욱 도탑고 믿음직한 탓ㅎ이기도 하리라. 낙우송 사이로 바라다보이는 6월 하늘에서는 가지가 흔들릴 때마다 그 짙푸른 쪽물이 금시 쏟아질 것만 같아 좋거니와, 5월부터 개화하기 시작한 태산목은 겨우 10년이 되었는데도 매일같이 두 세 송이씩 연이어 꽃이 피는가 하면, 그 맑은 향기가 어찌도 그윽한지 문향(聞香) 10리를 자랑하는 난(蘭) 또한 감히 따를 바 못되리라.
백련꽃 송이처럼 탐스러운 봉오리에 어쩌면 향기를 가득 저장하고 있는 것만 같다. 아침 저녁 솔깃이 흘러드는 그 향기를 맡아 본 사람이면 알리라.
택변(宅邊)에 오류(五柳)를 가꾸어 ‘한정소언 불모영리(閑靜少言 不慕榮利)’ 의 도(道)를 터득한 도연명(陶淵明)은 그대로 저 향기 높은 태산목 같은 거목이 아니었을까 생각될 때, 장미류의 관목처럼 눈부신 꽃이고 싶어하는 덴 머리를 써도, 태산목처럼 격 높은 향기를 마음에 지니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에, 내 스스로 향기 지닌 마음의 여유 없음을 슬퍼할 따름이다.
2
주례 중에서도 혼인 주례쯤은 할 만한 주례이지만, 그것도 백여 쌍이 넘고 보니 이젠 맡기에도 힘이 겨워서 ‘제자에 한해서’ 라는 단서를 붙여 놓고 실천해 오지만, 그 또한 단서대로 되지 않아서 걱정이다.
도시 단서라는 것은 말썽 많은 것이어서, 모르면 모르되 법을 다루는 데도 예의 단서가 있어서 말썽이 되기 마련이 아닌가 생각한다. 단서가 있어서 편리한 때도 있겠지만, 단서가 있기에 불편할 때도 없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
주례 청이 들어오면 먼저 달력에 색연필로 둥그랗게 표를 해놓고 그도 못 미더워서 탁상일기에 기록해 놓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주례 날짜가 다가오면 거의 천편일률이지만 다소 그 주인공에 알맞은 색다른 주례사를 찾아보다가도 막상 예식장에 나가면 그 장속같은 데서 그만 질서를 못 챙기고 만다.
가람 선생처럼 우스갯소리로 얼버무려 넘긴다든지, 독특한 유우머로 씻어 넘기는 재간이라도 있으면 그토록 큰 부담은 느끼지 않으리라.
한 번은 연탄 배달을 하고 있는 제자의 주례를 맡아 나도 모르는 사이에 흥분된 어조로 주례사를 하고 있자니, 신랑도 너무 감격했던지, 그의 눈에서는 끝내 눈물이 흐르고 있는 것을 보고서야, 아뿔사! 말머리를 돌리기에 진담을 뺀 일이 있다.
그 뒤 그는 천만 뜻밖에도 금으로 만든 넥타이핀을 놓고 갔다. 알고 보니 일금 삼천 삼백 원이라는 것이다.
바로 연탄 공장에 물었더니 개당 배달료가 1원이라는데 나는 또 한번 놀랐다. 은사 주례를 위해서 그는 3천 3백 개의 연탄 배달삯을 고스란히 던져 넥타이핀을 샀다는 계산이 된다. 그 넥타이핀을 받고 난 뒤 한참 동안 넋을 놓고 앉았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시울이 뜨거워 오는 것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 넥타이핀을 깊이깊이 간직해 두고 여간 경사스러운 자리가 아니면 꽂지 않는다.
언제쯤 그도 연탄 공장을 덩스럽게 꾸며 놓고, 트럭으로 하루 몇 천 개씩 출하를 하게 될 것인지, 가끔 이런 생각에 잠기는 때가 많다.
3
이 동네로 옮아온 지 어언 10년이 넘었고, 오던 길로 심은 나무가 이젠 모두 장년기(壯年期)를 훨씬 넘어, 태산목(泰山木)과 낙우송(落羽松)은 지붕을 넘게 자랐다.
자질구레한 나무만 바라보아도 한결 마음이 개운한데, 이쯤 지붕을 넘을 만큼 든든하게 자랐으니 차라리 시시하게 살아온 내 하잘것 없는 인생을 송두리째 맡겨도 위우칠 것 없을 것만 같다.
무심코 바라본 뜰에는 갓 피어난 태산목 꽃이 여러소이 흡사 백련(白蓮)처럼 탐스럽고 청초하기 이를 데 없다. 더구나 간간히 흘러드는 그 향기란 저 건란(建蘭)에 뒤질 배 없으니, 어쩌면 저렇게 격(格) 높은 향길 마음에 지닐 수 있을 것인가 하고 생각에 잠기곤 한다.
이미 작고한 R교수는 그의 <나무>라는 글에서 윤회설(輪回說)이 참말이라면, 죽어서 나무가 되고 싶다고 이야길 한 적이 있다. 차라리 꽃이 피고 지는 나무와 같이 살다 보면, 이 또한 나무에서 배운 미덕(美德)일 것이다. 어찌 구지레한 속정(俗精)에 이끌려 청정(淸淨)한 마음에 작은 파문(波紋)인들 일으킬 수 잇으랴. 심은 지 40년이 넘는 내 고향 옛집의 은행나무가 이젠 아름드리 거목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문득 아내에게 그 은행나무가 벌써 내 관목(棺木)감이 훨씬 넘었대 하고 이야길 했더니 무척 못마땅한 눈치다. 어찌 그런 매정스런 말을 하느냐고 핀잔을 주는데는 아무래도 죽음에 대해선 담담할 수 없는 모양이다.
문 밖에 심은 버드나무도 벌써 10년이 가깝게 자라고 보니, 이른 봄부터 찾아와서 옥을 굴리듯 울어 주는 밀화부리도 버드나무가 없었던들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다. 그러기에 이 근방에서는 버드나무가 있으면 어느 지점에 와서 문앞에 버드나무가 세 그루 서 있는 집이라면 무난히들 찾아오게 마련이다. 당초엔 다섯 그루를 심어 정성들여 가꾸었는데 이웃집에서 가을 낙엽에 성화를 내고 자기 집 옆에 서 있는 놈만은 베어 주었으면 하기에, 그 집 주인에게 처분을 맡겼더니 베어다가 장작으로 패 땐 모양이고, 또 한 그루는 동네 애들이 매일 시망스럽게 매달리는가 했더니 끝내는 껍질을 홀랑 벗겨내는 등쌀에 그에 고사(枯死)하고 보니, 남은 세 그루가 옆채를 사이에 두고 태산목과 마주보고 있게 되었다.
그대로 다섯 그루가 자랐더라면 택변(宅邊)에 오류(五柳)를 가꾸어 ‘한정소언 불모영리(閑靜少言 不慕榮利)’의 도(道)를 터득한 저 도연명의 풍모를 배우자 함이었더니, 세 그루가 남게 되어 짓궂은 친구가 찾아올라치면 숫제 삼류 선생(三流先生)이라 부르는 데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까닭은 고작 삼류(三柳) 인생을 살아가는 나에게 오류(五柳) 선생은 못될지언정, 삼류(三柳) 선생의 칭호도 오히려 과분한 것만 같아 설마 삼류(三柳) 선생이라 부르는 것은 아니겠지 하고 자위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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