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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1

[좋은수필]바람이 분다 / 민현옥

바람이 분다 / 민현옥

 

 

 

체감온도 영하 20도C. 맑지만 바람이 불어 보온에 신경 써야 한다는 일기예보에 조금은 두려움이 일었다. 두꺼운 옷과 목도리 장갑 등 만반의 준비를 하고 나선 길이지만 세찬 바람 때문에 온 몸은 움츠러들었다. 여수공항에서 습지와 갈대밭으로 유명한 순천만 황경생태공원까지 가는 길은 꼬불꼬불 들고 돌아야만 했다.

“겁나게 추워 부려요.”사투리를 쓰는 택시기사는 너무 속력을 내는 바람에 우리를 긴장시켰다. 얼마나 흔들렸는지 내리자마자 딸아이는 멀미가 난다고 차가운 공원벤치에 길게 누웠다. 그 앞에 서서 주위를 둘러봐도 갈대밭은 보이지 않았다. 저만치 걸어 나가야만 볼 수 있나 보다. 아이의 멀미가 멈추기를 기다려도 나아지질 않았다. 갈 길이 바빠 마음이 초조해지려 한다.

순천만 가까이 있는 광양에서 결혼 후 5년 동안 살았었다. 큰아이는 자기의 어릴 적 기억이 어슴푸레하게 난다며 가보고 싶어 했다. 그곳에는 이웃에 살면서 친하게 지내던 미술학원을 운영하는 이가 있었다. 그동안 대학원에 다녔다면서 졸업 전시회를 한다는 연락이 왔다. 그녀에게 축하도 해 주고 싶고 살던 곳도 가보고 싶어, 스무 살이 넘은 딸과 함께 그곳을 향해 나선 길이었다.

광양에 살던 동안 바로 옆 동네 순천에 대해서는 그냥 작은 도시로만 지나왔다.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에 나오는 안개도시가 순천이었지만 사는 동안 그런 기운을 느껴보지 못했다. 바다는 가까웠지만 짙은 안개도, 순천만 드넓은 개펄 또한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 늘 아쉬웠다. 하동이나 진주로 가는 국도 길가 개펄과 갈대밭이 조이기는 했었다. 그 당시는 그런 곳이 관광 명소도 아니었기에 보고 싶어 하는 내 말에 남편은 자신의 기준으로 언제나 ‘별 볼 것 없다’였다. 바다를 매립한 그 당에 시멘트 철 기둥을 세워 공장을 짓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한 사람에게는 갈대밭이 운치가 있다거나 구경거리는 아니었다는 것을 이제는 이해를 한다.

순천만 670만 평의 넓은 개펄과 습지, 갈대밭이 람사르(ramsar)협약에 등록된 환경생태 공원으로 거듭났다는 소식을 지난 가을에 TV화면으로 보았었다. 딸아이와 여행에서 굳이 이곳을 다녀가야겠다고 선택한 이유는 그 화면을 보면서부터였다. 저녁에 서울로 돌아가려면 마음이 바빠졌지만 딸아이는 멀미가 가시지 않는다고 차가운 벤치에 일어났다 누웠다 뭉그적 뭉그적이다. 해는 말갛게 내리쬐는 매서운 바람은 둘러싼 옷소매와 목도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서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내놓는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는 그것을 헤쳐 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렸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떼어 놓았다.

- 김승옥 「무진기행」

 

김승옥은 자신의 고향 순천을 안개의 마을 ‘무진시’로 표현했다. 소설 도입부에서 무진이란 이름에 걸맞게 아늑하고 몽상적인 분위기를 제시한다. 여행을 계속하면서 그 소설이 계속 따라 붙었다. 온통 주변이 짙은 안개로 채워지는 곳에, 온통 갈대밭으로 둘러진 텅 비어 있기도 한 그곳에 가고 싶었다. 그런데 오늘은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햇살아래 바람만 세차게 불고 있다.

개펄공원 쪽으로 걸어갔다. 아치형 나무다리를 건너야 했다. 다리 이름이 ‘무진교’였다. 다리를 건너면 통나무로 연결된 끝없는 길이 개펄 위 갈대숲 속으로 이어졌다. 텅 빈 하늘과 갈대뿐인 주위를 둘러보면서 안개 속에 갇히는 상상은 잠시라도 즐겁다. 햇살, 바람, 갈대만이 가득했다. 날이 추워 사람이 거의 없었다. 윙윙 부는 찬바람은 구름 한 점도 가만 두지 않고 몰아내버린다. 마른 잎을 서로 부비며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사르르 사르르 부딪치는 소리가 가슴으로 들어왔다. 이 바람을 오래도록 끌어안고 싶었다. 카메라를 꺼내는 손가락사이로 찬바람은 에워싸듯 찰싹 달라붙는다. 우리의 발걸음은 종종걸음이 된다.

신경림의 시, ‘갈대’가 적혀 있는 찻집에서 따스한 찻잔을 앞에 두고 유리벽 너머에 있는 갈대숲을 바라본다. 혼란이나 방황 그리고 그리운 것들은 저 밖에 있을 듯, 딸아이와 나는 같은 곳을 응시한다. 이십여 년, 이 아이 나이만큼의 세월도 저 부는 바람의 속도로 우리 앞을 스쳐갔다. 갈대는 속울음이라는 시구가 바람 따라 돌고 있다.

소설 속 주인공이 안개속의 시간, 무진기행을 마치고 현실의 세계로 돌아가듯 나 또한 조금 후면 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것이다. 내 가슴 한켠의 그리움이 뒤섞이는 무진의 기억을 뒤로 하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