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필세상/좋은수필 1

[좋은수필]곶감 / 오병훈

곶감 / 오병훈

 

 

 

시골에서 소포를 보내왔다. 야무지게 묶은 끈을 풀고 상자를 열자 빛깔도 뽀얀 곶감들이 서로 몸을 기댄 채 가지런히 누워 있었다. 손가락으로 살짝 눌러 보면 말랑말랑한 것이 아기의 볼처럼 탄력이 있다. 금방 하얀 시설(柹雪)이 손 끝에 묻어난다. 그 손가락을 혀 끝에 대면 달콤한 여운이 입안으로 녹아든다.

감을 깎아서 말린다고 다 좋은 곶감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가을 한 철 수확기에 곶감을 말리는 일이야말로 얼마나 고된 일인지 모른다. 밭일로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오면 방안 가득 쌓야 있는 감. 낮에 따 수북하게 모아놓은 감을 잠자리에 들기 전에 다 깎아야 한다. 시기를 놓치면 감이 물러 홍시가 되기 때문에 곶감을 만들 수 없다.

곶감을 잘 말리려면 여간 정성을 들여야 하는 일이 아니다. 우선 감을 딸 때부터가 예삿일이 아니다. 옛날에는 장대로 감을 꺾어서 땄다. 줄을 맨 바구니에 감을 따 담고 가득 차면 아래로 내렸다. 감나무는 수백 년이나 된 노목들이 많았는데 사람이 가지 위로 올라가지 않으면 쉽게 딸 수가 없었으므로 가끔 사고가 나기도 했다. 옛날에는 감나무 목재로 화살촉을 깎았을 정도로 나무가 단단하여 휘는 법이 없다. 시골에서는 떨어져 다치는 사람 중에 감나무에서 사고를 당하는 사람이 많았다. 휘지 않으니 단단한 줄 알고 조금 더 끝으로 다가가다가 가지가 부러진다. 휘혐을 무릅쓰고 감나무에 올라가 감이 달린 가지를 꺾었으니 비능률적인 작업이 아니었던가.

요즈음은 감을 따는 방법이 많이 달라졌다. 나무에 올라가 가지를 흔들면 약한 꼭지가 부러지면서 감이 떨어진다. 나무 아래서 넓은 천막을 들고 서 있으면 떨어진 감을 깨뜨리지 않고 모을 수 있다. 지금은 껍질을 벗기는 벙법도 많이 달라졌다. 모터를 단 꼬챙이에 감을 끼우고 돌리면서 칼날을 대면 겁질이 얇게 벗겨진다. 저녁에 시작하여 자정까지 졸면서 작업을 하다 보면 손을 다치기도 한다. 곶감은 이처럼 어렵고도 힘든 작업과정을 거쳐 맛있는 가공식품이 된다.

전에는 감을 깎아 싸리가지에 꿰어 말렸다. 잘 마른 곱감은 살색을 띠고 색이 선명하다. 이것을 꼬챙이에서 뽑아 한 줄에 열 개씩 열 줄을 한데 묶으면 백 개가 되는데 이 묶음이 한 접이다. 곶감 백 접을 한 동이라 하는데 모두 만 개의 감을 깎아야 한다. 내 고향 감골에서는 보통 한 농가에서 몇 동씩 곶감을 말리기도 하니 얼마나 고된 작업이겠는가.

잘 말린 곶감은 뽀얀 분칠이 되어 있지만, 처음부터 시설이 생긴 것은 아니다. 실온에서 갈무리하는 동안 표면에 부이 올라 달콤한 서리와 시설이 피어나면서 곶감이 된다. 이것은 감 속의 당분이 겉으로 빠져나온 것이므로 겉면에 시설이 잘 피어야 저장성도 좋고 맛도 훌륭하다. 이러한 곶감이라면 독에 담아서 시원한 곳에 두면 이듬해 여름 풋감이 나올 때까지 저장할 수 있다. 감은 제사상에도 올라야 하는 과일이므로 가을에는 연시(軟柿)나 침시(沈柿)를 쓰고 겨울부터 여름까지는 곶감을 제상에 올린다.

곶감을 먹을 때는 꼭지를 떼야 한다. 그리고 꼭지 쪽에 조금 남은 껍질이 있는데 씹으면 딱딱하여 씹는 맛이 덜하다. 입으로 베어내고 마른 과육을 빚으면 단단한 씨가 들어 있다. 감 산지에 따라 씨가 없는 감도 있고 한두 개 정도 적은 씨가 든 것도 있다. 살점을 씹으면 쫄깃하고 유년의 추억처럼 달콤한 맛이 입안을 적신다. 한 알의 곶감이 얼마나 맛이 있었으면 이름만으로 무서운 호랑이까지 쫓았다지 않는가.

곶감은 씨를 발라내기 쉽지만 같은 감이면서 홍시는 씨와 과육이 쉽게 분리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감씨 때문에 홍시 먹기가 싫다고 하지만 포도나 수박만큼 씨가 많은 것도 아니고 석류처럼 먹을 것도 없이 씨를 뱉어야 하는 과일도 아니다. 말랑말랑한 홍시는 그냥 빨아먹어도 좋고 반으로 갈라서 먹어도 된다. 부드럽고 달콤한 과육을 삼키고 나면 입 안에 딱딱한 씨가 남게 마련이다. 먹을 수 없는 씨라고 버릴 필요는 없다. 딱딱한 씨에도 쫄깃거리는 살점이 붙어 있다. 혀끝으로 굴려가면서 조금 붙은 살점을 빨아 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홍시를 먹어본 사람이라면 그 묘미를 일찍부터 터득했으리라.

시럽 상태의 홍시는 잘 터지지만, 곶감은 휴대할 수 있어 어디든 갖고 다니면서 간식으로 먹을 수 있다. 곶감을 먹을 때마다. 풍성한 가을을 함께 삼킨다. 졸음에 여워 몇 번이나 손가락을 벤 아버지의 아픔도 함께 먹는다. 감 따려다 나무에서 떨어진 삼촌은 언제나 꾸부정한 모습이다. 그 고된 삶의 한숨도 곶감 속에 배어 있으니 결코 단맛만은 아닐 터이다. 그러나 내 의지와는 달리 실제 곶감을 먹으면 달다고 아니할 수 없다.

아직도 이렇게 감을 깎아 말려 보내주시는 누님이 있어 나는 누구 부럽지 않은 부자다. 힘든 노동을 할 수 있는 건강한 누님을 생각하면 고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가슴에 안개가 피어오른다. 누님은 지난가을부터 초겨울까지 내내 감을 깎고 말리는 일에 매달려 왔다. 손가락은 언제나 감물이 들어 하루도 깨끗한 날이 없었겠지.

어릴 때는 감물에 젖은 아버지의 손이 싫었다. 외출이라도 하는 날이면 댓돌에 손바닥을 문질러 감물에 젖은 때를 씻어내는 아버지가 정말 싫었다. 그렇다고 깊이 스며든 때가 씻어지겠는가 여느 아버지들처럼 우리 아버지의 손도 하얘지기를 바랐지만, 손톱 속까지 스며든 까만색은 언제나 그대로였다.

곶감을 먹을 때마다 아버지의 감물 든 송이 생각나 목이 메고, 감 따라 높은 나무에 올라갔다가 떨어진 삼촌의 구부러진 등을 생각하면 눈물까지 함께 먹어야 한다. 이제는 감을 깎았던 두 분 모두 세상에 안 계시는데 아직도 곶감을 보내주시는 누님이 있어 그 맛을 잊지 못하고 있다. 곶감 한 알 한 알마다 비와 바람과 햇볕이 스며 부풀고 빛깔이 붉게 물들었다, 게다가 감나무를 가꾸고 감을 깎아 곶감이 되기까지 눈물겹도록 힘들게 일한 분들의 고마움을 잊을 수 없다.

다시 곶감 하나를 집어 하얀 시설을 혀에 대 본다. 달콤한 향기와 함께 솜사탕처럼 감미가 녹아든다. 세상이 달라졌어도 곶감은 아직도 유년의 맛을 그대로 감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