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소(歸巢) / 이숙희
우울하거나 특별한 사색이 필요할 때는 명상음악인 귀소(歸巢)를 듣는다. 명상음악은 생활에서 오는 팍팍함을 용해시키고 성정(性情)을 아름답게 이끌어 준다. 오늘도 나는 우리 가락과 우리 악기로 연주된 귀소를 들으며 이 순간에서 저 세상으로 생각의 건너뛰기를 한다.
몇 변이나 호흡을 가다듬으며 산비탈을 오른 후에야 시어머니의 산소에 도착했다. 양지바른 곳에 자리한 시아버지의 산소와는 달리 가파른 산비탈에 다리한 시어머니의 산소는 산그늘로 햇살이 짧아서인지 잔디가 잘 자라지 않는다. 잔디를 새로 입혀 보기도 하고 그늘을 만드는 나무를 잘라 버리기도 했지만 여전히 초라해 보이는 산소의 봉분 위에는 누군가의 발자국으로 반질반질하다. 하필이면 시어머니의 머리부분이 자리하고 있음 직한 곳이다. 아무래도 위쪽에 자리한 산소를 찾은 성묘객의 발걸음이었던 게다.
아들은 밑그림조차 그릴 수 없는 할머니가 숱한 사람들에게 짓밟히고 있는 것이 못내 속상했는지 성묘를 마치자마자 가시넝쿨과 나뭇가지를 꺾어 울타리를 쳤다. 그러고도 안심이 되지 않은지 가파른 신비탈에 이리저리 엉켜진 잡풀과 나뭇가지를 잘라내고 그 위의 단풍잎을 쓸어내어 새로운 길을 만들었다. 그러니 제법 길처럼 보인다.
결혼식을 마치고 신행(新行)의 첫 도착지는 초라한 묘지 앞이었다. 묘지에는 산비탈 어디쯤서 주워 놓은 듯한 큼지막한 돌 하나가 웅크리고 있었다. 그 돌은 시어머니의 거처를 산비탈로 옮길 당시 중학생이었던 남편이 어머니의 가슴에 이름표를 달 듯 묘지 앞에 갖다 놓은 것이었다.
“인사해, 여기에 어머니가 누워 계셔.” 가슴 깊숙이 토해 내던 남편의 목소리에는 서러움이 잔뜩 실려 있었다.
남편과의 결혼은 이미 예견된 고난이었다. 열네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열여섯 살에 어머니마저 돌아가시자 남편은 졸지에 칠 남매의 소년가장이 되었다. 주위의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서툰 발걸음을 시작한 맏며느리의 자리는 어쩌면 아무리 거부하려 해도 거부할 수 없는 연민과 으 어떤 소명감 같은 것이었는지 모르겠다. 첫아이를 낳고 부기도 가시지 않은 모습으로 치러야 했던 시누이의 결혼식을 시작으로 시동생들의 결혼식이 연이어졌다. 간간이 형제들과의 동행에 예상치도 않은 덜커덩거림이 있을 때면 아무리 야무지게 마음먹고 애써 담담함을 가장하여도 초심(初心)과는 달리 온몸의 세포는 시어머니에 대한 원망으로 꿈틀대고 있었다.
그 무거운 짐들을 한 보따리 한 보따리 풀어 내릴 때마다 그 아득한 세월들을 풀어 한 권의 책으로 엮고 싶다는 어쭙잖은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온통 아우성뿐인 그 아득한 세월을 어설프게라도 엮을 수만 있다면 먼 후일 귀천(歸天)하여 채권자에게 부채를 요구하듯 시어머니 앞에 내어 좋고자 함이었다.
시어머니께서 세상의 끈을 놓으셨을 때 세 살바기였던 막내 시동생이 몇 해 전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벌써 몇 번이나 앉아 본 그 혼주의 자리가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일이지만 서른 중분을 훌쩍 넘기고서야 결혼식장에 들어서는 막내 시동생을 보면서 여느 형제의 결혼식과는 달리 만감이 교차하였다. 그것은 그 시동생으로 하여 새댁이었던 나를 영락없는 재취(再娶)신세로 만들었던 것에 뿌듯함만은 아니었다.
그럭저럭 나의 결혼생활이 벌써 25년째이다. 그 세월이면 시어머니가 이 집안의 며느리로 사셨던 것보다 더 두꺼운 세월이다. 그 세월만큼이나 정(情)도 얽히고 설켜 더러는 보람으로, 더러는 부끄러움으로 남아 있지만 시어머니가 낳으신 아들들의 까탈스러웠던 식성도, 그토록 낯설었던 이 집안의 인심도 이젠 시어머니보다 더 익숙해진 것 같다. 평소 그렇게도 시어머니께 하고 싶었던 많은 말들도 언제부터인지 슬그머니 사라지고 아무리 떠올려도 텅 빈 허공뿐이다. 며느리로서 시어머니를 향해 늘 불평만 해대던 내가 어느새 이 집안에 이는 조그만 바람에도 조바심이 나고 그 흔들림이 두렵기만 하다. 나의 온 신경줄은 문밖의 저벅거리며 귀가하는 소리에 매달리게 되고, 현관에는 식구 수만큼의 가지런한 신발을 확인하고서야 안도하게 된다.
바람에 흔들려 서로 찢고 찢기며 살아온 두 나무의 가지가 적당히 포기하고 더러는 양보하여 하나가 된 연리지(連理枝) 처럼, 어쩌면 고통과 희열의 공감이 서로 하나로 일치가 되고, 지고 가는 삶의 무게만큼 기쁨과 보람도 크다는 평범한 진리를 내 스스로 체득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평생 며느리로만 존재하리라 생각했던 나도 이제 이 집안의 굳은살이 박히고 얼마 후면 모든 허물과 절망을 품어야 할 시어머니가 될 것이다.
철없는 나의 투정에 늘 죄인이 되어야만 했던 남편도 이젠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나이가 되었다. 생각해 보면 고단한 삶에서 맏이의 정신적 파업 한 번 없이 신께 간절히 두 손을 모아 온 그의 침묵적인 삶도 참으로 서럽기 그지없으리라.
시어머니의 산소 앞에 줄지어 선 가족들이 정성스레 성묘를 한다. 잔디가 듬성듬성한 봉분을 보니 그 동안 쏘아 롤린 수많은 화살로 온통 상처투성이가 되었을 시어머니 생각에 가슴이 저려온다. 두고 간 어린 자식으로 인하여 사후의 삶조차도 맏며느리에게 저당을 잡히신 듯, 저렇게 음습한 산자락에서 단 한 번의 뒤척임 없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던 시어머니는 늘 채무자였고 나는 늘 채권자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삶은 늘 살아 있는 자의 몫이라 했으니, 내 삶이 다 닳아지는 날 아무리 거부하려 해도 시어머니와 나는 살아 있는 이들의 선조라는 이름으로 나란히 눕게 될 것이다. 그리고는 대대로 그들의 보호를 받을 것이다. 시어머니 앞에 서게 될 그날을 생각하면 몹시 두렵지만 그날은 누구도 거부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언제일지 모를 그날을 위하여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는 시어머니의 부채를 부지런히 지워 나갈 것이다.
가을햇살이 유난히 분부시다. 잔잔히 흐르고 있는 이 아름다운 귀소의 선율이 바람결에 승화되어 시어머니가 계신 곳까지 날아갈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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