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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1

[좋은수필]그리움 열기 / 최원현

그리움 열기 / 최원현

 

 

 

 

작은아이가 열세 살인데 우리집엔 열세 살짜리가 또 하나 있다.

아이가 두 백일쯤 됐을 무렵, 시골에 계시는 외할머니께서 녀석을 위해 마련해 보내신 선물이다. 닷새에 한번씩 서는 시골장에서나 어쩌다 봄직한 네 발짜리 까만색 개다리소반이었다. 할머니 말씀으로는 앉혀서 놀게 할 때나 밥을 먹일 때, 앞에 펴놓아 주면 아니가 넘어지지 않으리라는 것이었다. 사실 그때는 할머니 말씀처럼 그렇게 요긴하게 쓰일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것을 쓰면 쓸수록 더욱 정이 들고, 나중엔 우리 남은 세 식구까지 서로 탐내어 사용하려 들었다. 더욱이 그것은 여느 소반처럼 딱딱하지가 않고 부드러워서 깨어질 염려가 전혀 없는 데다 재질은 값싼 재생 수지 같은데도 열에는 아주 간하여 아무리 뜨거운 그릇을 받침 없이 올려놓아도 끄떡없었다.

그러다가 작은아이가 두 돌이 지나면서부터 소반의 주인이 바뀌게 되었다. 녀석이 그걸 집어들고, 소반 위에 올려놓은 것이 있어도 상관없이 막 엎어버리는 통에 더 이상 녀석의 전유물로 남겨둘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이 때를 틈타 제 누이가 자기 몫으로 해버렸고, 나도 틈틈이 곁다리 사용을 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라면을 끓였을 때나 떡볶이를 해 먹을 때의 받침상으로 그만이었다.

 

어렸을 때 할머니께서 아궁이에 불을 때시면 나는 곧잘 그 옆에 쪼그리고 앉아 타 들어가는 불길을 지켜보곤 했다. 그런 나를 위해 할머니께선 아궁이에 고구마를 넣어 구워 주셨는데, 나는 부엌을 생쥐마냥 들락날락하며 고구마가 익기를 기다리곤 했었다. 고구마는 그런 나의 성화 속에서 뜸이 들고, 이윽고 할머니의 부지깽이에 의해 아궁이 밖으로 나오게 되면 나는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손을 뻗쳐 고구마를 덮치곤 했다. 그러나 내 여린 손가락이 어찌 그 뜨거운 고구마를 당할 수 있으랴. 내가 비명을 지르면 할머니께선 쯧쯧 혀를 차시며 고구마를 집어 그릇에 담아주셨다.

참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른들은 뜨거운 것도 이겨낼 수 있는가 보다고 생각하면서 까맣게 탄 고구마의 껍질을 벗겨내고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노오란 고구마 속살을 호호 불며 먹곤 했었다. 고구마도 맛이 있었지만 나의 먹는 모습을 지켜보시며 흐뭇해하시던 할머니의 미소는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귀하게 간직하고 있는 짙은 그리움이다. 내가 소반을 유달리 아껴 사용하는 것도 어쩌면 그런 할머니에 대한 애틋한 향수와 사랑을 간직하고 싶은 이유 때문이지도 모른다.

요즘 들어 개다리소반의 사용 횟수가 부쩍 는 것 같다. 고등학생인 큰아이와 중학생인 아들 녀석에게 나의 별미 요리를 제공하는 기회가 늘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제 어미가 해 주는 것보다는 가끔씩 내가 해 주는 별미에 완전히 매료되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제 아빠의 입맛을 닮은 데다 그 입맛에 마춘 것이니 그 맛이 어디 가겠는가.

아이들과 함께 ‘맛있다’를 연발하며 엄청난 양을 순식간에 먹어치운다. 그때엔 필히 개다리소반이 우리 셋을 둘러 앉힌다. 뜨거운 그릇 채로 소반에 올려놓고 둘러앉아 열심히 음식을 먹는 아이들을 보며 내게서도 할머니께서 보이셨던 그 흐뭇한 미소가 저절로 흘러나온다.

요새는 사고 싶은 욕심이 막 일어나게 하는 좋은 물건들이 갖가지 방법으로 우리의 귀와 눈과 마음까지 유혹한다. 그런가 하면 우리집을 찾는 사람 중엔 지금도 이런 소반을 다 쓰느냐며 이제 그만 버리라는 사람도 있다. 허나 그럴 때마다 우리 식구들은 서로 바라보며 말없이 웃고 만다.

졸은 것, 귀한 것이란 겉이 번지르르 하고 고풍스럽게 보이는 것이라고만 생각하는 요즘 사람들. 그래서 조금 여유만 있는 사람이라면 산 지 얼마 안 되었어도 때 따라 가구며 생활용품들을 새로 나온 것, 더 좋다는 것으로 곧잘 바꾸곤 한다. 나도 그들을 부러워하는 하나일 테지만 우리의 삶 중엔 쓰지 못하는 것이라도 쉽게 버릴 수 없는 것도 많지 않던가. 하물며 쓰는데 아무 불편 없고 단단히 정이 들어 내가 아끼는 것임에야. 그런 면에서 우리집의 개다리소반은 참으로 귀한 물건이다.

그렇다고 소중하게 다룬다는 것이 아니다. 집어던지고 떨어뜨려도 깨질 염려 없고, 아무 데고 처박아 두거나 굴려도 흠집 나고 변형될 걱정이 없는 우리집의 개다리소반은 오늘도 작은 아이의 간식상이 되고, 늦은 시각에 돌아온 큰아이의 밥상이 되고, 아내의 뜨거운 냄비 받침이 된다.

아주 좋은 것일수록 조금만 흠집이 나도 못쓰게 되고, 또 유행에 밀려 버림받기도 쉬운 것 같다. 하지만 시커멓게 볼품은 없어도 먹어 보면 감칠맛 나는 묵은 김치처럼 우리집의 개다리소반은 이젠 돌아가신 지 여러 해 되신 외할머니의 유품이 되어 그리움의 창이 된다.

어쩌면 할머니는 이 볼품 없는 개다리소반을 통해 늘 가까이서 나와 나의 아이들에게 남아 있고 싶으셨는지도 모른다. 사랑은 이렇게 밤새 촉촉하게 내리는 이슬처럼 가슴에 남는 것인가 보다.

더 세월이 가면 이 소반도 버려질 때가 오겠지만, 그때가 오더라도 쉽게 버릴 수 없을 것 같은 마음이 드는 것은 있다가 없어졌을 때의 허전함과 그리움을 이겨낼 자신이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조금 있으면 큰아이가 돌아올 시간이다. 오늘 저녁 간식은 아빠의 기찬 솜씨로 떡볶이 잔치나 벌려 볼까. 냉장고 문을 여는 나의 발 앞에서 고즈넉이 가슴을 열고 있는 개다리소반이 오늘따라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 열기를 하고 있다.

내가 상를 차려 아이들과 함께 둘러앉게 되면 모락모락 오르는 김 속에 할머니의 미소가 함께 피어오를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