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맛과 끝맛 / 정봉구
“첫맛이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아셔?”
깔끔한 다방이었다. 자리에 앉아서 커피를 시키고 난 다음에 건네온 송 박사님의 질문이었다. “아쇼?” 해도 좋을 텐데 “아셔?” 하고 말을 낮추어 부드러운 어감으로 상대방의 기분을 살피는 말솜씨. 송 박사님, 벌써 칠십을 넘은 고령이니까 ‘님’ 자를 붙여야 옳을 것 같다. 숱이 많은 머리가 위로 치솟은 것으로 미루어 비록 백발이긴 하지만 기(氣)가 왕성하리란 추측이 간다. 밝고 명랑한 기상(氣象)만 보아도 그분이 아직 건강하고 여유 있음을 짐작케 한다.
끝맛이 좋은 것? 자리가 다방인데다 시킨 것이 커피였으니까. 그 수수께끼의 답이 쉽게 짐작되었다. 마침 주문한 커피도 배달되었고 구수한 향내가 한층 더 우리의 분위기를 따뜻하게 한다.
“첫맛이 좋은 것은 맥주맛, 첫사랑의 맛….”
당신이 물어 본 것은 끝맛이었는데 이쪽에서 대답하기 전에 당신이 먼저 기선을 잡고 대칭적인 답에서 시작하는 화법도 재미있다. 그리고 정답은 밀어두고 두 번째 질문이 나왔다.
“커피 좋아하셔?”
선뜻 대답이 떨어지지 않는 내 얼굴을 건너보며, 당신이 가지고 계신 커피 분쇄기라나 하는 기구를 주고 싶다는 것이다. 어떤 것인지 얼른 형모가 떠오르진 않지만 원두커피를 가는 것이란다. 커피를 으깨면서 가루를 만들다 보면 손목운동도 되고 여느 커피보다 훨씬 향내와 흥취가 그윽하단다. 아마도 무슨 절구 같은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그냥 설명에만 웃음으로 답했다. 지금 생각하니 선뜻 반색을 하며 주십사할 것을 그랬나 보다. 별로 커피 맛을 모르는 주제에 그렇게 장인(匠人)적인 기구를 물려받겠다는 말이 차마 나오지 않아서였는데, 항상 무엇인가를 누구에게 주고 싶어하는 그분에겐 받는 것이 기쁨으로 새겨졌을 테니까 말이다.
매주 주말이면 산에서 만나는 사이다. 오르며 내리며 또 길섶에 앉아서 나누던 대화가 오늘은 다방에서 마주하니 좀 더 은근하다. 사람이 늙으면 욕심이 늘고 인색해진다는데, 이분은 마냥 남에게 주기를 좋아한다. 어려부터 부유한 집안에 자라며 굽히지 않고 살았다는 소문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런 얘기들의 실마리가 직접 풀렸다. 아주 젊어서였다고 한다. 하루는 예쁜 여성과 동반하여 당시로는 희귀한 고급 레스토랑에서 커피를 마시고 나오는데, 음식값을 치르려고 주머니를 찾아보니 지갑이 없었다. 집에서 너무 서두르는 바람에 잊고 나왔더란 것이다. 하는 수 없이 할아버지께서 주신 금딱지 회중시계를 맡기고 나왔다는 것이다.
그 금시계 얘기에서 당신의 할아버지 얘기로 옮아갔다. 구한말 조대비 친가와 사돈 관계였다나. 손이 귀하고 남자가 없는 조대비 친가 조씨 댁 재산 관리를 해주기 위해 그 집에 상주하시던 할아버지를 뵈려 늘 그 조씨 집에 드나들었다고 한다. 종로구 시천교당 근처의 아흔아홉 칸짜리 집이었다고 한다. 그처럼 큰 집을 관장하며 재산 관리를 하시던 할아버지가 주신 시계였다고 한다. 송 박사님의 커피 애호 취미도 따지자면 그 할아버지에게서 받은 영향이라고 한다. 그분의 할아버지는 벌써 당시에 커피를 즐기셨다니까.
남의 얘기처럼 힘 안 들이고 당신의 신상 얘기를 피력하다가 마침내 ‘끝맛’ 얘기가 나왔다. “끝맛이 좋기는 커피 맛, 그리고 영화의 라스트 신이죠.” ‘커피를 마시며 입 안에 남는 향기와 그 끝맛을 즐길 줄 아는 사람’ 이 진짜로 커피의 맛을 아는 사람이라 하였다.
모르긴 하지만 그분의 상념(想念)속에 첫사랑과 커피와 영화감상으로 얽힌 어떤 추억이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러나 별로 그런 흔적도 안 보이는 단지 서술자(敍述者)일 뿐인 그분의 얘기다. 등산을 하면서도 항상 끊이지 않는 화제가, 듣는 사람에게 편안하였던 그 분의 인상을 되새긴다. 칠십쯤 된 노년에 아직도 인생의 센티멘탈리즘을 되씹는다면 조금 처량할 것 같다. 하기야 생각하니 나름으론 노년에 남는 우수(憂愁)가 한 가닥 미스터리로 늙음을 장식할 수도 있긴 하지만, 자칫하면 청승맞게 보일 염려도 있다.
커피잔 바닥에 아직 남은 얼마간의 커피를 얼른 마셔버리지 않고 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얘기를 계속하는 송 박사님. 나는 언뜻 그 분에게서 인생의 끝맛이 은은함을 느꼈다. 우리의 첫 경험이 어떤 것이었든 사람은 그 노년에 맞이하는 삶이 진기 있고 값진 것이어야 되겠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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