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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1

[좋은수필]보이스 피싱 / 김인자

보이스 피싱 / 김인자

 

 

“급하게 돈 좀 돌릴 수 없을까? 사채라도 괜찮아.”

늦은 밤 걸려온 전화기 너머 들려오는 친구의 목소리는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해결사라는 별명을 가진 친구인데 갑자기 무슨 일로 돈이 급한지 궁금했지만 참았다.

보름쯤 지나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항상 먼저 나와서 수다를 떠는 친구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전화도 연결되지 않았고, 문자도 보냈지만 묵묵부답이었다. 모두들 궁금해 하는데 한 친구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돈을 빌려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자 몇몇 친구들은 나도, 나도 했다. 분위기가 이상했다. 모임을 마치고 친구의 집에 찾아갔지만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무슨 일이지? 친구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애를 태우며 발걸음을 돌렸다. 수차례 연락을 하였지만 ‘전원이 꺼져있어…’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멘트만 들려올 뿐이었다.

한 달이 지난 후 친구가 찾아왔다. 초췌해진 얼굴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모습에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고 진정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한 시간은 지났을까.

“눈을 뜨고 있어도 코 베가는 세상이야, 곧 이사가.”

얼이 빠진 모습으로 한참을 앉아있던 친구는 그렇게 입을 열었다.

친구는 남편과 사별하고 아들 하나를 키우며 살았다. 애지중지 아버지의 몫까지 사랑을 담아 그렇게 키운 아들이었다. 아들은 엄마의 바람대로 잘 자라 주었고 올봄에 입대를 하였다. 훈련을 나간다는 연락이 있은 후 늦은 밤 다급한 목소리의 전화를 받았다. 아들이 사고로 병원에 있는데 많이 다치지는 않았으니 놀라지 말라는 당부까지 했다.

“어머니가 침착하게 행동하시기만 하면 됩니다.”

자상하게 알려주며 부대에서 알게 되면 군법회의까지 가야하니 합의금조로 삼천 만원을 준비하라고 했다. 아직 선임들은 모르고 있고 합의를 본 뒤 연락을 할 테니 준비한 돈을 바로 송금을 하라고 하였다.

한통의 전화에 친구는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려 아무것도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오직 자식을 살려야겠다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 통장을 다 합치고 여기저기 친구들에게 부탁을 하여 돈을 마련하여 송금을 했다. 하루해가 다가도록 해결이 잘 되었다는 반가운 연락은 없었다. 어떻게 키운 아들인데 행여 잘못되면 어쩌나, 불명예제대라도 할까봐 애를 태우며 속을 끓였다.

며칠 후 검게 탄 얼굴로 아들이 휴가를 명받았다며 집으로 돌아왔다. 친구는 아들의 얼굴을 대하자 그제야 안심이 되어서 온몸을 쓰다듬으며 무사해서 다행이라고 감추었던 눈물을 쏟아냈다. 해결은 잘되었느냐는 친구의 말에 아들은 무슨 소리인지 눈만 멀뚱멀뚱했다. 휴가 나오기 전까지 훈련을 하였다는 아들의 말에 그제야 뒤통수에서 불이 번쩍 났다. 경찰에 신고를 하고 은행에 가서 확인을 하였지만 이미 통장은 비어있었다.

친구의 얘기를 듣는 순간 20여 년 전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격동의 80년대 연일 크고 작은 시위가 벌어졌다. 그 시기에 동생이 입대를 하였다. 태권도 유단자였던 동생은 시위 진압을 위해 차출되었다. 시위를 막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부상은 끊이지 않았다. 타박상에 화상도 입고 뼈가 부러져 입원도 잦았다. 부모님은 항상 조바심으로 애를 태웠다.

그날도 시위하는 장면을 TV로 보면서 점심식사를 하는 도중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동생의 직속상관이라면서 다툼이 있어 민간인이 많이 다쳤는데 빨리 합의를 해야 한다고 했다. 부대 내에서 알려지면 큰일 난다고 하면서 50만원을 송금하라고 해서 시키는 대로 하였다. 아버지는 아들이 얼마나 다쳤는지, 합의는 잘 되었는지 걱정하다가 머리를 싸매고 누우셨다. 걱정하시는 부모님을 대신하여 서울까지 갔지만 동생은 작전을 나가고 없었다. 자세하게 물어볼 수도 없고 되돌아와서 그냥 잘 있다고 부모님을 안심시켜드렸다.

며칠 후 동생은 포상휴가를 나왔다. 손에 붕대를 감고 있어 적정을 하였더니 진압하다가 조금 다쳤다고 했다. 학생시위를 진압하다가 직장노조시위가 있어 지방에 갔다가 올라와서 포상휴가를 나온 것이라고 하였다. 합의는 잘되었느냐고 했더니 무슨 합의냐고 펄쩍 뛰었다.

아버지는 어떻게 자식을 이용해서 부모의 애간장을 태우며 돈을 뺏어 가느냐고 한숨을 쉬셨다. 송금한 돈에 미련이 남았지만 소용없었다. 다음날 경찰에 신고를 하였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었고 그 사건은 까맣게 잊혀졌다. 그리고 일 년이 지난 후 또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똑같은 이야기를 하며 송금을 하라는 내용이었다. 알았다고 대답만 해놓고 경찰에 신고하였다. 그 후로는 연락이 없었다.

부모는 자녀의 사고 소식에 가장 당황한다. 그런 심리를 악용하여 사기꾼들이 전화를 하는 것이다. 교묘하게 현재 상황을 알아내고 또 확인 할 수 없다는 것을 이용하여 학생들은 제적을, 군인에게는 군법회의 운운하면서 겁을 준다. 일반인들은 범죄자가 될 것이라고 협박을 한다. 자식이 다쳤는데, 전과자가 된다는데 어느 부모가 혼비백산하지 않을 수 있을까? 확인하는 방법밖에 없지만 그것이 쉽지가 않다.

친구는 아무것도 못 믿겠다며 전화벨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뛰어 전화기 선을 빼어놓는다고 했다. 하루 빨리 친구가 마음의 안정을 되찾고 일상으로 돌아와서 차근차근 일들을 풀어나가길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