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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1

[좋은수필]입춘대길立春大吉

입춘대길立春大吉 / 김애자

 

 

 

열흘째 영상매체와 활자에 빗장을 걸고 지낸다. 가끔씩 이렇게 문명으로부터 벗어나면 삶의 여백이 넉넉해진다. 거실 소파에 앉아 종일 앞산과 마주하여도 좋고, 군불로 달구어진아랫목에 앉아 뜨개질을 하면서 얼음장 밑에서 두런거리는 물소리를 듣고 있으면 심신이 그럴 수 없이 편안하다. 틱낫한은 몸 안에서 몸을 관찰하고, 느낌 안에서 느낌을 관찰하고, 마음 안에서 마음을 관찰하라고 하였지만, 겨울 한철 조용한 칩거를 통해 가슴속에서 그 무엇인가 빛나고 있음을 느끼곤 한다.

요즈음 자주 산을 찾는다. 여우인지 노루인지 모를 짐승들의 발자국이 꽃잎처럼 찍힌 눈 위를 걷기도 하고, 마른 가지들이 얼기설기 드리운 그림자 속에서 낙엽 밟히는 소리를 들으며 산을 오르다 보면, 청량한 기운이 내 안으로 스며든다. 아름답고 향기로운 것들은 이렇듯 가까이 있고 내 안에서 나를 기다린다.

그러나 이러한 한유(閑裕)를 즐기는 것도 겨울철에나 가능하다. 농사를 전업으로 삼진 않아도 남새라도 가꾸어 밥상에 올리려면 해토머리부터 일손이 바빠진다. 가장 먼저 하는 것이 김치 광을 헐고 항아리를 파내는 일이다. 빈 항아리를 가셔 내고 하늘이 내려앉도록 물을 가득 퍼 담아 우린다. 그 다음은 장을 담그는 일이다. 메주를 씻어 독에 놓고, 미리 풀어둔 소금물을 붓는다. 소금과 메주와 물의 비율을 잘 맞추어야 장이 제 맛을 낼 수가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경험을 통해 터득하지 않으면 얻어 낼 수 없는 만만찮은 일이다. 장 담그는 일을 선두로 호박 구덩이를 파고 두엄을 퍼다 안긴다.

씨감자를 손보고, 마늘밭에 덮어놓았던 짚을 걷어 낸다. 짚 속에서 병아리 주둥이만큼 자란 마늘 싹이 생명의 강인함을 여실히 드러낸다.

이쯤이면 경운기는 연일 통통거리며 거름을 싣고 흙냄새 자욱한 전답으로 나가기 시작한다.

이리되면 나에게도 입산금지령을 내린다. 남들은 바쁘다고 동동거리는데 혼자만 휘적휘적 산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민망하여 스스로 입산을 삼가 하는 것이다. 여기선 문학이니 철학이니 예술이니 하는 것은 농작물을 생산하는 것과는 별개다. 그 어떤 진리도 학문도 농사의 생산성을 뛰어 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흘 굶어 도둑질하지 않을 장사는 없다는 속담처럼, 결기가 대쪽 같은 선비도 배고프면 밥 한 그릇에 지조를 굽히고 비굴해질 수도 있다. 육체는 언제나 지성적이기보다는 본능적이길 원한다. 하지만 본능의 정직함을 위해 손에 연장을 들어본 지성인들이 얼마나 될까. 밥을 생산하는 이들과 한통속으로 섞여 보지 않고는 생산의 항상성(恒常性)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깨닫기 어렵다.

낙엽송이 빼곡한 가풀진 능선을 타고 올라가면 늙은 굴참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이곳이 나의 산책로 종점이다. 굴참나무에 기대어 마을을 내려다본다.

산 밑에 소곳이 엎드린 가옥들이 두세두세 모여 있다. 가난에 쪼들리어도 어느 당 어느 권세한 오리에도 손잡아 본 적 없는 사람들이 엉덩이에 몽고반점이 있는 조선의 자식들을 낳아 기른 집들이다. 자식이란, 가족이란 삶의 힘이요, 영혼의 중심이다. 영혼의 중심을 지키기 위해 삶이 맘먹은 대로 되어지지 않아도, 시절이 아무리 험해도, 세월 한 번 거를 줄 모르고 씨 뿌려 거두며 한 생을 대지에 굽으려 살아온 본적지다.

며칠 후면 입춘이다. 아직 땅은 동면에서 깨어나지 않았고, 사람들은 들보에 메주가 달려 있고 콩나물시루가 놓여 있는 방안에서 화투를 치면서 피박을 씌웠다고 파안대소하면서 농한기를 즐기고 있다. 정보화 시대에서도 국제 경제력에서도 하등의 소득을 올리지 못하는 계층들이다. 하나 분수에 맞지 않는 일에는 곁눈도 주지 않는다. 절망의 나락에 닿으면서, 뿌리를 땅에 묻고 사는 것들의 우매함을 이해하며, 사는 방식을 나름대로 터득하였기 때문이다. 농가부채란 것도 헛되이 욕심을 앞세운 사람들이나 지는 빚이다. 산에서 내려와 붓끝에 먹물을 듬뿍 찍어 ‘立春大吉’을 써서 문설주에 붙여 놓았다. 이는 눈치 없이 강설을 등에

지고 눌러 있는 동장군에게 보내는 최후의 통첩이다.